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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제9화 고균 김옥균의 유랑행적기(1) 제2장 일본 속에 맺힌 한인들의 원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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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03면

<모두 네 차례·일본 들러>
김옥균(자=백온·호=고우·별호=고균)이 일본에 들른 것은 도합 네 차례.
첫 번째는 1881년12월 31세 때. 그는 단순한 시찰목적으로 홀로 일본에 건너갔다가 반년만에 돌아왔다. 그때 그는 이미 횡빈에서 「후꾸사와·유기찌」(복택유길·명치시대 신사상의 선각자로서 경응의숙대학의 창립자)와도 만나 교우를 트는 한편 자유롭게 일목각지를 시찰하면서 크게 깨우친바 있었다.
두 번째는 그 이듬해인 1882년 32세 때. 임오군란의 뒷수습을 위한 사죄사로 박영효(사죄대신) 김만식(부대신) 서광범(종사관) 등이 일본에 갔을 때 신구양파를 대표하여 김옥균과 민영익이 특사고문격으로 수행한 것이다.
이때 김옥균은 일본측과 교섭, 서재필 등 43명의 청년들을 호산학교(당시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시키는 한편, 「이노우에·가오투」(정상형)외무대신 추천에 의해 횡빈정금은행에서 국정개혁자금으로 17만원(일화)의 차관을 얻는데 성공했다. 이는 한국인의 첫 일본유학이자, 동시에 한국의 첫 대일차관이 된다.
세 번째는 첫 방일 다음다음해인 1883년 초여름, 호산학교에 입학케 된 유학생들을 인솔하고 일본에 건너갔다. 이때 김옥균은 제1차 차관 17만원만으로는 국정을 개혁하는데 부족하다고 판단, 한국의 광산을 담보로 3백만원의 추가차관을 교섭했으나 실패, 이듬해인 1884년1월에 귀국했다.
귀국한 김옥균은 12월4일에.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3일천하」로 끝나고 네 번째로 이번에는 일본에 망명했다』
김옥균이 다시 일본을 떠나 상해로 갔다가 암살(1894년)되기까지 일본에 망명해서 머무른 기간은 약10년. 이 동안에 김옥균은 태평양상의 「오가자와라」(소립원·1887년)섬과 북해도(1889년)로 사실상 유배처분을 받기도 하는 등 「도오꾜」에만 안주하지 못한 채 일본각지를 유전하는 비운의 나날을 보내야했다.
이러면서 김옥균은 정·재계인사들과 널리 교류, 숱한 사적과 많은 서폭 등을 남겼으며, 사후의 명치·대정·소화연간에는 일본에서 김옥균에 관한 여러 차례의 추도행사가 있었고 또한 서지가 간행됐다.
김옥균취재에 착수하자마자 「생전의 김옥균목격자」 「야쓰몬지·야이찌」(팔문자팔일)씨를 만날 수 있었던 것(12월10일자<일부지방 11일자>본보7면 기사참조)도 김옥균의 행적이 일본 안에 얼마나 널리, 그리고 뿌리깊게 남아있는가를 웅변해주는 것이다.
「야쓰몬지」씨가 생전의 김옥균과 만난 일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것은 우연한 일 때문이었다.

<일 농가에 장기간기거>
5, 6년 전의 어느 해 여름, 「미모」(수호)시에 사는 교포실업인 백태경씨는 마늘을 사기 위해 교외농촌지대로 나가 어느 호농가를 찾아들었더니, 한 일본인촌로가 한국인임을 알고 김옥균이란 사람을 아느냐고 묻고, 어릴 때 김옥균을 만난 얘기들을 털어놓더라는 것이다. 백씨는 그후 어느 민단 모임에서 이 얘기를 했으나 아무도 관심을 표명치 않더라는 얘기였다.
이번에 달려간 기자와 함께 백씨는 5, 6년 전의 기억을 다시 더듬어 수호시 서남쪽20㎞쯤 되는 곳에서 과수원과 채소밭으로 둘러싸인 「야쓰몬지」가를 잦아내는데 성공했다. 옛날부터 이 지방에서 세력을 떨친 호족의 가계에서 「야쓰몬지·야이찌」씨는 종손이라는 얘기. 마침 「야쓰몬지」씨는 88세의 고령인데도 안경을 끼고 책을 읽고있었다. 책이름은 『소천정의 역사』. 인생의 황혼기를 맞아 향토의 역사를 되새겨보고픈 심경이 80년 동안 간직해온 김옥균의 기억을 낯선 한 한국인에게 털어놓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방문목적을 설명하자 표정이 밝아지면서 「역사의 증인」다운 자랑스러운 말투로 옛기억을 하나하나 되새겨 갔다.
『그동안 애들한테 얘기를 하면 쓸데없는 소릴한다고 투박만 맞았다』는 「야쓰몬지」씨는 『김옥균관계로 취재 당하기는 처음』이라면서 『그때 김옥균이 암살됐을 때는 신문을 보고 마을에서도 큰 화제가 됐었다』는 것.
「야쓰몬지」씨에 따르면 지금 56호가 살고있는 이 마을은 당시만 해도 겨우 16호, 「팔문자」가를 비롯한 4성의 집안들이 마을 인구의 전부였다. 이 가운데서도 「야쓰몬지」가는 중심적 존재로서 집안 권속도 꽤 많았다는 얘기다. 울타리 안만 8백40평이라는 넓은 대지에 자리잡은 저택은 일부가 현대적으로 개조되기는 했으나 3백년의 긴 연륜을 말하듯 아름드리 대들보에는 까맣게 꺼멍이 끼여있다.
지금 「야쓰몬지」가 중에서 이 마을에 남아있는 것은 단두집. 당자인 「야쓰몬지·야이찌」씨 집과 5백m쯤 떨어져 또 한집, 김옥균이 장기간 거처했다는 「겐조」(건삼)씨의 집이다.
역시 지은지 3백년이 넘었다는 「겐조」씨 집은 옛 일본농가의 모습 그대로 초가지붕에 집안의 절반은 바닥이 흙인 헛간처럼 돼있다. 이 집에는 김옥균이 글을 쏜 종이들이 숱하게 남아 있었으나 철없는 애들이 벽을 발라버렸다는 「야이찌」씨의 얘기다.

<글쓴 종이 아직 수두룩>
그러나 「야이찌」씨 부인의 친정에는 지금도 김옥균의 일행 가운데 누군가가 썼다는 휘호들이 남아있다고 했다. 부인이 직접 모사해 온 것을 펼쳐봤더니 「한수정처」라는 글에 「조선삼품참의 유혁노」라 쓰여있고 「팔문자군정」이라 돼있다. 유혁노는 김옥균의 망명기간 중 줄곧 주변에 있던 사람으로 김옥균 관계자료에는 도처에 등장하는데 이 마을에도 따라왔던 것 같다.
김옥균의 휘호는 꼭 한 폭이 남아있었다. 김옥균이 묵었던 「겐조」씨 집에 있던 것으로「겐조」씨의 숙부(화전괴개)가 화전가에 양자로 가져갈 때 갔다는 것이다. 「야이찌」씨 집을 나서서 다시 수호시를 가로질러 이번에는 동남쭉으로 10여㎞, 차가 간신히 지나갈 만한 좁은 농로를 거쳐 당도한 록도군욱촌의 「와다」(화전)가는 마당 한쪽에 소정미시설까지 갖춘 역시 호농집.
아쉽게도 「와다·가이스께」(화전괴개)씨는 작년에 작고, 거실에 위패가 안치돼있다. 「며느리」된다는 여인의 안내로 거실에 들어섰더니 한쪽 벽에 김옥균의 휘호가 액자로 걸려있다. 오랜 세월에 종이가 삭아· 몇 군데 구멍이 나고 한 두 군데 너덜너덜해져서 「균」자가 보이지 않으나, 「고균거사」라는 낙관만은 또렷하다.
며느리 되는 여인의 말투로 보아 고인이 아껴 걸어놓기는 했으나 유리도 씌우지 않은 채 먼지를 뽀얗게 쓰고 너덜너덜해진 채 걸려있는 품이 그저 무심코 그냥 걸어둔 것일 뿐 그렇게 소중히 간직하는 것 같지가 앉다. 그럴 바에는 「고국에라도…」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차마 말이 떨어지질 않아 사진만 찍고서 백태경씨와 함께 고인의 위패 앞에 향도 피우고 합장했더니 이에 감격했는지 눈치 빠른 며느리가 『갖고싶다면 가져가도 좋다』는 얘기다. 얼싸 좋다고 『그렇다면 새로이 표구를 해서 고국의 어느 박물관에 보내겠으며 일간 다시 찾아와 적당한 사례를 드리겠다』고 인사하고 물러났다.
액자는 백씨가 우선 표구를 맡기로 하고 「도오꾜」에 돌아왔는데 그날 밤으로 고인의 아들 된다는 분이 백씨에게 전화를 걸어와 「아내」를 야단쳤다면서 흥정 비슷한 얘길 꺼내서 그대로 돌려주었다는 연락이 왔다. 덕분에 김옥균의 『휘호서폭귀국작전』은 와해돼 버렸다.

<휘호서폭 귀국은 실패>
「야이찌」노인이 읽고있던 『소천의 역사』를 들쳐봤더니 김옥균이 머무른 「이바라기」(자성)현 일대는 서기2백년께부터 한반도 도래인이 집단정착, 양잠과 철구생산이 성했고 서기7백년에는 「백제 환보상륙수」라는 사람이 이지역 행정책임자로 부임했으며, 이에 앞서 서기660년에 백제왕족이 망명, 귀족대우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서기704년에는 녹당의 「와까마쓰하마」(약송연)라는 곳에서 사철로 검을 만들었다고 돼있다.
뿐만 아니라 일본최초의 대장군이된 도래인계의 「사까노우에·다무라마로」(판상전촌마려)는 동북지방의 「에조」(일본동북지방민을 번족이라 하여 이렇게 불렀다)정벌 때 여러 차례 이곳에 머물렀다 갔다는 기록이다.
그러고 보면 「야쓰몬지」가는 일본 「가마꾸라」(겸창)시대의 명가인 「헤이깨」(평가)의 후예라는데 『평가는 백제계도래인의 가계』(판구안오저역사기행편참조)라니 「야쓰몬지」씨 자신의 가계가 백제계일지도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떠올랐다.
옛날부터 상전과 관개기술로 이름이 있는 관동지방 단 하나의 농업지대, 어딘가 한국의 어느 농촌을 연상케 하는 풍토 속에서 김옥균은 무엇을 생각했을 것인가-. <계속>

<차례>
제2장 일본 속에 맺힌 한인들의 원한
제5화 북해도 한인위령탑의 「엘레지」
제6화 가등청정의 볼모 일요상인 서간
제7화 신진도의 성녀「오다·줄리아」
제8화 포로학자 정희득의 우수
제9화 고균 김옥균의 유랑행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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