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3)<제자 전택부>|<제33화> 종로 YMCA의 항일 운동 (33)|전택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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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흥업 구락부>
1921년 이승만이 신흥우에게 『의리의 지팡이』를 준 이후 국내에서는 흥업 구락부가 조직됐다. 포면상으로는 물산 장려 운동인 것처럼 ①돈을 모아 부를 이룩하자 ②국내의 물산을 장려하자 등의 표어를 내세웠지만 실상은 『해외의 독립 운동 (특히 이승만)을 돕자』라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주요 회원은 이상재 (초대 회장) 윤치오 (2대 회장) 신흥우 유억병 유성준 장두현 정춘수 최남 김일선 신홍식 신석구 구자옥 김응집 최두선 손창원 김윤수 김준연 김동성 이관구 조정환 이철원 이건춘 장권 등과 「하와이」와 미주에도 다수 있었다.
회원을 뽑는 방법으로서는, 한 회원이 한사람을 추천하여 가하다 생각하면 백색 바둑알을 넣고 부하다 생각하면 흑색 바둑알을 넣어서 흑색 바둑알이 하나라도 있으면 회원이 못되었다. 이와 같이 엄격하게 회원을 얻은 다음 회원 집이나 비밀 장소에서 모였다. 그후에는 YMCA 4층에다 보료를 깔고 모이기도 했다.
표면상의 사업으로서는 연천에다 약 1만원 어치의 땅을 사 가지고 농장을 경영했다. 1923년7월 「하와이」 학생 모국 방문단을 맞이하여 남학생들은 YMCA3층에서 자게 하고 여학생들은 장두현 회원 댁에서 자게 했다. 장두현씨는 구한국 정부 고관 출신으로 동양 물산 주식회사와 한성은행을 경영한 갑부였고 1920년 조선 체육회가 창설될 때는 초대 회장으로 당선된 사람이다. 1924년 YMCA야구단을 「하와이」로 원정 보낼 때는 그가 돈도 보내고 비용을 많이 댔다.
이와 같이 학생 모국 방문단과 야구단이 오가고 한것은 민족 운동이 목적이었으며, 이에 대해서는 이미 몇해전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난에다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때 쓰지 못했던 체육 얘기, 즉 체육을 통한 항일 운동 얘기를 하나 하겠다. 즉 1929년10월 Y유도 창립 20주년 기념으로 우리 나라 최초의 단체 유도 대회가 YMCA 주최로 있었다.
그때의 특징은 심판 용어로 한판·절반·거기까지·그만 등의 용어를 썼고, 유도 술어로서는 업어치기·허리후리기·모두걸기·밧다리 후리기·안다리후리기·띄어치기·허리후리기·배대뒤치기 등 우리말을 썼던 것이다. 이는 일어 상용을 강요당하던 그 때에 우리말로 유도 용어를 썼다는 것은 범상한 용기로서는 단행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1931년부터는 일인 단체인 유도관 조선 지부 주최로 유도 대회가 열리기 시작했는데 수십개 참가 「팀」 중 한국인 「팀」은 YMCA 「팀」뿐이었다. Y 「팀」은 일인들의 편파적인 부정 심판으로 패하기를 연 6년간이나 계속하다가 1937년 대회 때에는 32판 시합에 28승 2무승부 2패의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선수들은 6개월간 합숙 연습을 했으며 그 합숙 비용은 타의 신세를 아니 지고 선수들의 각자 부담으로 했으니 이는 오로지 부정 심판에 대한 조선 유도인들의 정신적 패기 때문이었다.
그때 활약한 선수 중에는 양학현 유덕길 유남수 장호성 김상영 윤병치 김완진 고덕문 등이었고, 유도 학교장 이제황씨는 지금도 그 당시의 회고담을 흥분된 어조로 말하고 있다.
1926년의 얘기다. 그때 벌써 일제는 조선인 관리들에게도 일어 상용을 강요했다. 그래서 배재학교 졸업식이 정동 교회에서 열렸을 때 총독부와 경기도에서 나온 고관들과 조선인 시학관들도 일본말로 축사를 했다. 모두가 어색하고 아니꼽게 생각했다.
월남 선생은 당신의 손자인 홍직이 졸업하기에 겸사겸사 참석했다가 뜻밖에 축사를 하라기에 서서히 단위에 올라섰다.
그는 한참 동안 관중을 내려다보더니 『여러분 조선말 들으실 줄 아우? 난 일본만을 할 줄 몰라 조선말로 하겠소』해서 식장 분위기를 삼엄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일본말이 유행되어 사람을 부를 때에는 긴(김) 장(양) 복(박) 쌍(양)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미국 갔다온 사람들은 「미스터」 김 「미스터」박 하는 것이었다. 월남 선생은 그것이 귀에 거슬려서 『요새 어떤 사람들은 일본 사람 행세를 하느라고 「김 쌍놈」 「박 쌍놈」 하더니, 어떤 사람들은 미국 사람 행세를 하느라고 「미쳤다 김」「미쳤다 박」하니, 참 꼴사나운 일이 많다』하며 풍자를 했다.
물산 장려 운동은 일대 배척이 주목적이었다. 하나 그전부터 월남 선생은 항상 한복만 입고 겨울에는 남바위 (풍덩이) 위에다가 중산모를 쓰고 다니는 것이 가관이었다. 그래서 어떤 청년이 『선생님! 어째서 남바위 위에다 모자를 쓰십니까?』하고 물었더니 『그러면 모자 위에다 풍덩이를 쓰랴』해서 사람들을 웃겼다. 윤치오 선생은 홀태바지 즉 양복 바지를 조선 바지처럼 대님으로 묶고 그 위에다가 외투도 입고 조선 두루마기도 입고해서 유명했다.
육당의 말과 같이 그는 한국 개화의 선봉이지만 무턱대고 서양 냄새를 피우는 따위의 풋나기 개화꾼은 아니었다. 그는 5개 국어를 유창하게 쓰는 외국통 이지만 함부로 외국말을 쓰지 않았으며, 영어 편지도 붓으로 썼다. 신흥우 박사 역시 손을 대기만 하며 베어질 듯한 쪽 뺀 양복을 입고 다니는 신식 멋쟁이였지만 때로는 고동색 무명 두루마기에 굵다란 명주실로 짠 두루마기를 입고 다녔으며, 「넥타이」는 댕기, 양말은 버선, 「와이샤쓰」는 속적삼, 연필이나 만년필은 붓, 「드라이버」는 나사 손, 「파이어·플레이스」는 혁화로 썼지, 절대로 외국어를 쓰지 앓았다. 더군다나 그는 일어를 절대 쓰지 않았다. 그것을 배우지도 않았다.
조만식 선생을 한국의 「간디」라고 했다. 하나 그가「간디」라면 YMCA는 그 「간디」를 낳고 길러준 고장이라 할까? 그도 역시 이상재 선생과 마찬가지로 조선일보의 사장을 역임하였는데 그 재임 시 한번은 무명옷 한복차림으로 서울 정거장 구내에 들어가 1·2등 찻간에 들락날락하는 것을 일본 순사가 시골 사람인줄 알고 밀어내다가 혼났다는 얘기가 있다. 그는 평양 YMCA 총무로 있을 때 조그만 사무실에 앉아 있기만 해도 일제는 그를 눈의 가시처럼 꺼려했다는 얘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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