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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0)제33화 종로 YMCA의 항일운동(30)|<제자 전택부>전택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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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농민구출운동>
전회에서 말한 바와 같이 YMCA당국은 농촌사업에 대한 조사와 방향설정과 조직을 마치게 되었다. 이를 위하여 국내의 많은 학자들이 동원되었고 국제조사단이 왔고 외국자본과 기술도입이 가능하게 됐다.
이야말로 한국 역사상 최초 CO운동이라고 할까! 국민의 85%나 되는 농민들을 계몽하고 그 의식을 개발하지 않고서는 민족의 독립을 기할 수 없다는 확신 아래서 근대적이며 과학적인 방법으로 지역사회 조직운동에 나선 것이 이 운동이었다. 오늘날 새마을 운동도 농어촌개발에 주력한다 하지만 YMCA의 농촌사업은 처음부터 자발적인 민간인들에 의하여 시작된 순 민간운동이었으며 일제의 식민정책에 의하여 빈사상태에 있던 유민들을 구출하는 정신운동으로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운동은 처음부터 국제적 협력을 얻어 기술도입이 가능했다. 1925년부터 외국인 전문가들이 오게되었다.
쌀에 대한 전문가인 미국의「어비슨」, 농촌교육의 전문가인 미국의「쉬입」, 축산· 과수전문가인「캐나다」의「번스」, 농촌경제전문가인 미국의「클라크」와「윌버」등이 오게 되었으며 이 사람들이 한국에 이미 와있던「프랙먼」「그레그」「반하트」등과 합세되어 강「팀」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 측에서는 홍병선을 비롯하여 계병호 이순기 최영균 조만식 이기태 등이 선발되었는데 홍병선은「클라크」와 함께 서울지방과 전국순회를 맡고 계병호는「쉬입」과 함께 선천지방을, 조만식은「내쉬」와 함께 평양지방을, 최영균은「어비슨」과 함께 광주지방을, 이기태는「클라크」와 함께 농민훈련소를, 이순기는「번스」와함께 함흥지방을 맡고 이은경 김현숙 황영수 등 여성들은 가가호호를 찾아다니며 안방 부녀자들을 맡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전국적인 인사 배치가 있은 후 추진된 것이「덴마크」식 농촌운동의 도입이었다. 때마침「예루살렘」에서 세계선구대회가 열리게 되었는데 한국교회는 양주삼, 정인과 김활난「노블」신흥우 등을 대표로 선출했다. 그러나 신흥우 김활난 등 YM-YWCA는 이 기회에「덴마크」식 농촌운동을 도입하자는 것이 더 큰 관심이었다. 그러하여 농촌부 간사인 홍병선을 동행케 했다. 그들은 1927년 여름에 출발했다.
지금은 비행기만 타면 2∼3일 안에 갈 수 있지만 그때는 배타고 인도양을 거쳐가든지, 아니면 기차 타고 만주와「시베리아」를 거쳐가든지 하는 어려운 여정이었다.
드디어 그들은 장도에 올랐다. 모든 국민이 이를 주시했다. 동아일보는 그 기사에서『정말은 일찍이 정치와 경제가 파멸되어 오늘날 조선과 같은 형편이었으나 경지개량과 축산장려·신용공동조합의 설치·국민고등학교의 보급 등으로 말미암아 지금은 북구의 낙원이란 이름을 받는 나라가 되었으므로 그것을 학술로 배우지 않고 제도와 실지를 견학하여 이것을 다 본뜨고자 한다』고 썼다.
한편 떠나는 YMCA대표들은「하층 빈민 소작인들을 위하여서는 아무런 시설이 없으므로 소작인은 밤낮 일하고도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청년회에서 계획한 설계를 실행함에 앞서 정말의 농촌사업을 배우고자 하는 것이며 장차 자금의 융통을 강구하는 한편 빈민끼리의 공동신용조합을 만들어서 농촌의 계량을 도모하고자 하는 것이며「덴마크」식의 국민고등학교의교사와 생도와 같이 일하고 배우고자 합니다.
그리고「러시아」를 경유하는 길에 그 나라 구매조합제도도 보고「덴마크」의 그것과 겨누어보겠는데 실상 공동조합이 우리나라에는 전혀 없으므로 예를 들면 고추나 담배를 파는 때에 이익은 중국상인이 다 먹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이런 조직을 본떠 농림사업에 힘쓰고자 합니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던 것이다.
「예루살렘」대회와「덴마크」농촌의 시찰을 마치고 돌아온 신흥우 총무는 1929년7월10일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이제는 제2단계에 들어갔다. 꿈과 이상의 시대는 지나가고 그 꿈과 이상을 실현시킬 방법과 지도력이 확립되어야 할 때가 왔다. 1929년과 그 이후에 한국YMCA가 해야 할 일은 실천방법과 지도자훈련에 있다. 우리는 단명한 인기주의에 빠져서는 아니된다. 우리는 건실하게, 참을성 있게 일함으로써 인민들을 그 경제적·정신적 도탄에서 구출해야한다. 지나간 2년9개월간에 사업기반은 섰다.
작년 8월말 현재 농촌사업이 시작된 촌락이 2백27개, 8세부터 60세까지 야학에 다니는 학생 수가 1만5백7명에 달했다. 협동조합 수가 22개, 농민회가 82개이며, 그 회원이 4천1백48명이다. 건물이나 시설 없이도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는 것은 우리의 가장 큰 자랑이었다. 농촌지도자 강습소를 강화하여 자원지도자를 길러야한다. 한국YMCA의 숙원은 농촌사업을 통해서 전체국민을 부흥시키는 일이다.」
이와 같이 YMCA농촌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났다. 모든 농촌교인들이 동원되었고 남녀 학생들이 동원되었다. 외국 선교사들까지 합세되어 국제세력이 형성되었다.「예루살렘」세계대회의 바람을 타고 활활 불이 붙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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