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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 여자의 비밀을 만드는 남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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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6면

브래지어.화장품.생리대 등 여성용품을 만드는 세계에서 남성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금남(禁男)의 영역'에서 전문성을 쌓아가는 남자들에겐 '여자의 감성은 여자가 가장 잘 안다'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여자가 아니기에 여성용품을 더 잘 만들 수 있다는 이들의 역설에서 최근 직업 현장에 거세게 불고 있는 '성(性)의 퓨전 현상'을 가늠할 수 있다.

브래지어

㈜비비안 상품기획부 브라팀의 김정훈(33) 과장. 그의 시선은 언제나 여인의 가슴을 향한다. 어떤 브라(브래지어)가 여인의 가슴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줄 수 있는지가 그의 최대 관심사다.

디자인뿐만 아니라 통기성.착용감까지 고려해야 하는 이 제품을 착용하지 않는 남자가 아이디어를 내려면 어려울 법도 하지만 이미 그는 브라 개발의 전문가 입지를 다지고 있다. 직업 의식에 투철한 나머지 지나가는 여성의 가슴에 시선을 주다가 엉큼한 사람으로 몰렸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최근 브라 하나에 무려 40여가지의 부자재가 들어가는 기능성 브라가 인기를 모으면서 그는 국내외에서 나오는 여성지는 물론 건강 과학 잡지 등을 꼼꼼히 살펴 여성들이 원하는 브라스타일을 연구한다.

여성용품인 브라를 기획하면서 겪어야 했던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적지 않다.

입사 초 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날 공항 세관원에게 외제 브라 샘플이 가득 든 가방을 검색당했을 때 느꼈던 당혹감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검색대 위에 갖가지 속옷들이 펼쳐지고, 사람들이 주변에 몰려들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얼굴을 붉혀야 했다. 가까스로 세관원에게 자신의 직업을 설명하고 나서야 공항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만원 지하철에서 들고 다니는 가방이 열리는 바람에 브라가 몽땅 바닥으로 떨어져 주위의 이상한(?) 눈총을 받은 적도 여러번 있다.

1995년 이 회사 상품기획부 MD(머천다이저)로 입사해 9년째 브라 개발에 매달려 온 김과장은 업계가 인정하는 베테랑이다. 그의 아이디어로 브라컵의 봉제선과 레이스를 없앴다.또 어깨끈을 투명하게 만들고 에어 패드를 넣어 착용감을 개선했다.

그는 "브라를 꼭 여성이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편견"이라며 "남성이 여성과는 다른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제품을 들여다보면 아이디어가 무궁무진하게 떠오른다"고 말한다.

김과장은 "한국여성들의 가슴모양이 서양여성처럼 점차 밑가슴 둘레는 작아지고, 윗가슴 둘레가 커지는 볼륨있는 형태로 바뀌어가는 추세"라며 "소비자들의 취향에 맞게 브라의 컵 사이즈를 다양화하고, 디자인을 차별화하는 데 주력할 것"이라며 오늘도 브라를 훔쳐(?)보고 있다.

마스카라

LG생활건강 화장품연구소 채해석(32)대리는 하루에 20번 이상 눈에 마스카라를 바른다. 너무 자주 바르다 보니 속눈썹이 빠지고 눈이 충혈되는 등 갑갑해져 요즘은 팔.다리에 나 있는 털에 마스카라를 테스트한다.

팔.다리의 털이 많아서 다행이라며 너스레를 떠는 채대리. 그는 여성의 눈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이다.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채대리는 입사 이후 3년째 마스카라에 몰입해 있다. 그는 지금까지 여성들이 평생동안 마스카라를 바른 횟수보다 더 많이 자신의 몸에 마스카라를 입혔다고 말한다.

채대리가 마스카라 연구에 매력을 느끼는 것은 얼굴가운데 눈이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마스카라를 하지 않는 여성은 남성들의 시선을 끄는 매력적인 눈을 가꿀 수 없다"며 마스카라 예찬론을 펼친다. 때론 마스카라 연구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마스카라를 지우는 것을 깜빡 잊고 퇴근해 주위 사람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백화점이나 길거리에서 세련되게 마스카라를 한 여성들을 보면 무조건 붙잡고 제품과 사용법을 꼬치꼬치 물어보는 버릇도 절로 생겼다.

그는 현장 설문조사를 통해 '속눈썹의 길이에 따라 마스카라의 효과가 달라진다'는 점을 알게 됐다. 짧은 속눈썹용과 긴 속눈썹용 마스카라를 따로 개발해 베스트셀러로 만들었다.

채대리는 "세심한 성격이어서 직업선택을 잘 한 편"이라며 "마스카라 이외에 다른 품목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자신이 원하는 스타일의 마스카라를 골라 속눈썹의 한올 한올에 부드럽게 발라주고, 반드시 아이메이크업 전용 리무버로 깨끗이 지울 것." 마스카라 전문가로서 여성들에게 던지는 조언이다.

채대리는 "마스카라로 눈에 '떡칠'을 하는 여성들이 의외로 많다"며 "마스카라를 너무 많이 바르면 눈 건강에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저마다 갖고 있는 눈의 자연미를 살릴 수 없다"고 덧붙였다.

생리대

P&G 과학기술연구소 류영기(41) 차장의 책상에는 언제나 여러 형태의 생리대가 펼쳐져 있다.

사내에서 '생리대 박사'로 통하는 류차장은 국내 및 아시아 지역에서 시판되는 이 회사 생리대 제품의 안전성을 검증하는 일을 하고 있다.

뭇 남성들이 입에 올리기도 꺼려하는 생리대와 매일 씨름하면서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많았지만 이 때문에 여성의 신체리듬에 대해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고 한다.

가족과 함께 대형할인마트에서 쇼핑할 때 혼자 생리대 코너에서 이것저것 유심히 살펴보다가 '변태'로 오인받기도 했고 친구들과 함께 하는 술자리에서는 항상 걸죽한 농담의 대상이 되곤 한다.

그러나 류차장은 한번도 자신의 직업을 부끄러워한 적이 없다. 심지어 샘플용으로 구입한 생리대를 여점원이 당황해하며 검정 비닐봉투로 겹겹이 포장할 때도 "제 연구품목이니까 잘 싸주세요"라며 웃음을 건넨다고 한다.

화학공학박사인 류차장이 95년 P&G에 입사하자마자 생리대를 담당하게 됐을 때 주변에선 걱정하는 시선을 보냈지만 정작 본인은 무척 기뻤다고 한다.

생리대가 여성의 위생과 건강에 중요한 품목인데다 제품 심사기준이 까다롭다는 사실이 그의 도전정신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 사내 과학기술연구소와 R&D 센터를 오가며 생리대 제품의 개발은 물론 안정성 평가 등을 하느라 하루 일과가 분주하다. 심지어 터득한 여성생리학 지식으로 생리 트러블을 겪는 여사원들에게 조언해주기도 한다.

한달에 한번 마술에 걸리는 여성들에게 "한가지 제품만 고집하지 말고 몸상태와 생리기간에 맞춰 다양한 종류의 생리대를 사용하라"고 권한다.

여성이 생리기간 중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쾌적하게 생활할 수 있는 생리대를 개발하는 것이 자신에게 떨어진 지상과제라고 서슴없이 그는 말했다.

글=정현목 기자, 사진=임현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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