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주는 신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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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마을 앞에선 아름드리 고목 느티나무가 오늘따라 더욱 엄숙해 뵌다.
우수수 깊어진 동구 숲엔 멀어져 가는 이해 가을의 모든 사연을 안은 채 낙엽은 참 많이도 져있고 소나무· 벚나무가 빛깔 곱게 엉기어 서있다.
새삼 그립도록 나무가 많다. 보리갈이가 끝난 들판은 쓸쓸해 더 넓어 보이고 아직도 산 위엔 물감 칠한 잎들이 유난스럽다. 저 멀리 한길가에 늘어선 나무줄기는 한결같이 묵묵하고 거무스름하다. 부엌에 앉아 내다보는 이 풍경의 진실함은 언제나 나를 감탄시킨다.
오래 전부터 내겐 저물어가는 자연을 응시하는 버릇이 생겼다. 저녁 지을때 쯤이면, 풍경은 더 정감 깊은 빛깔로 채색되어 있어 나를 부담 없이 감상하게 해준다. 뒷문 밖으로 보이는 밤나무의 마지막 잎새는 불쾌한 빛깔인데 그건「예이츠」의「깊은 가을」보다 더 깊어진 가을 탓이기도 하다.
저녁때는 멀리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는 왜 자꾸 꿈속처럼 들리고, 하늘은 왜 항상 추운 빛이며, 또 연기같이 날리는 구름은 왜 늘상 쫓겨가고 있는지를 알 수 없지만 다만 구름도 쫓겨가는 그 하늘은 가을은 아니고 겨울인 것이다.
어느 날 그 하늘을 배경으로 참새가 여러 마리 날고 있었는데 왜 그렇게 우스웠는지. 요즘 하늘은 경말 두껍게 파랗지가 않고 얄팍한게 살얼음판 같다.
길가를 가는 사람은 흔들거리고 풍경 속에 잠겨드는 나는 4차원의 세계를 느끼는 것이다. 숫제 부엌 바닥에 장작을 깔고 앉아 모든 의미로 저무는 자연을 본다. 대지 위에 황혼이 얌전히 배어들면 염소도 송아지도 다 집으로 온다. 뿌연 새벽에 그린 그림 같은 동네에 열 아홉해째의 내생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하늘이 어두워지면 별이 돋아 나오고 바람이 조금씩 일기 시작하는 골목길을 거닐며 산책한다. 가만 가만 낙엽지는 소리가 들리면「구르몽」의「낙엽」은 내시가 되고, 누군가 왔음 좋겠다고 생각해 버린다. 그리하여 오늘 하루는 내게 별보다 빛나는 꿈을 듬뿍 새기는 것이다.
가을처럼 모든 이의 가슴에 시를 남기고 순식간에 가버리고 싶다는 놀랍도록 신비로운 생각과 함께…. <이옥남(경북 영양군 석보면 주남동 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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