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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6)제33화 종로 YMCA의 항일운동(6)|<제자 전택부>전택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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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침략의 마수>
YMCA는 1903년 창립초기부터 일본사람 하나를 이사로 넣고 있었다. 그는「다까끼」란 사람이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일찍이 미국에 가서 대학을 졸업하고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온 미국통의 인물이다. 그는 귀국하여 1901년 일본인 동경YMCA의 회원으로서 재정이사라는 간부급의 경력을 가진「Y맨」이다. 한국에는 제일은행 경성지점장으로 부임하여 1903년3월 YMCA회관 건축비 모금을 위한 소위 한국최초의 국제회의 때에도 큰 역할을 했고, 10월28일 창립총회 때에는 12명 이사중의 한사람으로 뽑혀 초대 재정이사가 된 사람이다.
그는 기독교신자이고 미국통의 인물인 만큼 선교사들과의 인간관계도 원만하여 그가 이사가 되었다고 해서 부자연스런 점은 하나도 없었다.
그 뒤「다까끼」는 1904년2월 지점장 자리를 사임하고 본국에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대신「베크」란 선교사가 재정이사가 되고 일본인 이사로서는「와다」란 사람이 새로이 이사가 되었다. 그리고「메가다」란 자가 재정부위원중의 한 사람으로 첨가되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일본세력이 뻗치면서「브라운」이란 영국인 재정고문이 파면되고 그 대신 일본인「메가다」가 들어앉게 되었다.
그는 1904년8월에 체결된 외인 용빙 협정에 의하여 파송된 문제의 인물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이런 문제의 인물이 YMCA 조직 속에 끼여들 수 있었는가? 우선 YMCA조직의 성격부터 따져보면, YMCA는 국제기구인 만큼 어떤 민족이든 회원이 될 수 있었다. 초창기 YMCA이사회는 12명 이사중 10명의 외국인으로 구성되었고, 그 회장도 외국인이요, 총무도 외국인이었다. 그리고 불신자라도 일반 회원과 위원은 될 수 있다는 것이 헌장상으로 보장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재정부 위원이 되었다고 해서 불법은 아니다. 더우기 그때 재무부 위원장은「어비슨」이란「캐나다」사람이었고, 위원으로서는 영국인「모리스」, 미국인「류톤」·「베크」·「질레트」(길예태 총무)등이었던 만큼 일본인이라고 해서 못된다는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전임자인「브라운」이란 영국인은 재정관리위원장이었던 만큼 같은 재정고문인 그가 일본인이라고 해서 무시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해괴한 일은 김린이란 친일분자가 YMCA 부총무로 들어봤다는 사실이다. 그가 본래부터 친일분자였는지의 여부는 분명히 알 수 없다. 다만 그는 일찌기 선발되어 일본 유학을 다녀온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무슨 영문인지 체포되어 이상재 김정식 이원극 등 독립협회 지도자들과 같이 감옥 안에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는 사실과, 남보다 일찍이 개화된 사람이었다는 사실만은 틀림없다. 그리고 그는 처음부터 이완용의 사랑방에 과객처럼 드나들다가 신임을 얻어 이완용의 살림을 맡아보는 청지기가 되었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때마침 김정식 부총무는 동경유학생을 지도차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YMCA 총무가 되기 위하여 사임을 하고 부총무 자리가 공석이 되매 1907년부터 그가 그 후임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사람이 YMCA 부총무가 되었는지 궁금하기 그지없다. 처음 들어올 때부터 모종의 사명을 띠고 들어왔는지, 아니면 YMCA 당국이 그런줄 모르고 채용했는지, 아니면 어떤 정치적 압력이 있었던지 분명치 않다. 어쨌든 그가 부총무가 되면서 크게 활약한 것만은 틀림없다. 우선 그는 YMCA 회관을 짓는데 행정수완을 발휘했고 1년에 1만환씩 받는 국고보조를 어려움 없이 척척 받아와서 믿음직했다.
그는 성경반도 조직하여 잘 지도함으로써 인기도 있었다.
외국인 이사들과 YMCA당국은 그가 부총무가 된 후부터 도움을 받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나「질레트」총무의 고민은 컸다. 그의 입장은 난처했다. 그는 본래 단순하고 비정치적인 사람이었다.
성격이 원만하고 범 세계적 성격의 소유자라자 해서 선발되어 온 착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정부가 호의로 주는 국고보조를 안 받을 필요가 없으며, 또한 그것이 없이는 살림을 꾸려나가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아무런 조건도 붙지 않을뿐더러 외국인 일색의 재정위원회와 이사회는 정책적으로 그것을 기어이 받게끔 결의하였기 때문에 집행 책임자로서는 그것을 안 받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이미 1907년도부터 일반회원들은 이것을 반대해왔던 것이다.
이상재 등 간부급 위원들과 회원들은『그까짓 돈이 없더라도 죽지 않을테니 조금이라도 꺼림칙한 돈이라면 절대로 받아서는 안된다』는 의견이었다. 그리하여「질레트」총무는 한때 그것을 포기하고도 싶었다. 즉 그는 생각하기를『한·일 두 민족의 친화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한국에서 일하는 이상 한국민족의 감정을 거슬리면서까지 일할 수는 없다.
우리는 1만환 국고 보조를 잃을지라도 한국 민족의 마음을 잃어서는 아니 된다』고 말했던 것이다.
하나「이또」는 조금도 그 음흉한 내색을 보이지 않고 도리어 친절을 다했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그것은 처음부터 고종의 후의로 된 보조였기 때문에 그를 믿고 용감하게 놀받자는 것이 외국인 이사들의 생각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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