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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아야 이기는 워싱턴의 한·일 외교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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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상복
이상복 기자 중앙일보 워싱턴특파원
이상복
워싱턴특파원

요즘 워싱턴에선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일본과의 외교 대전이 벌어지고 있다. 새해 벽두부터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미국을 찾은 데 이어 다음주엔 일본이 핵심 관료들을 대거 파견한다. 아베 총리의 동생 기시 노부오 외무성 부대신과 야치 쇼타로 국가안보국장이 그들이다. 아베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둘러싼 논란 때문이다.

 온라인에선 ‘위안부 소녀상’을 둘러싼 공방이 한창이다. 일본인들이 캘리포니아주 글렌데일 시립공원 앞에 세워진 소녀상을 철거해 달라는 청원을 백악관 홈페이지에 올리자 한인들이 맞대응에 나선 것이다. 요즘 만나는 교포들마다 “사인했어요?”라고 물을 정도로 열기가 뜨겁다. 백악관 규정상 청원을 올린 지 30일 이내에 10만 명 이상이 지지 서명을 해야 당국의 답변을 들을 수 있다. 먼저 올린 일본 측 청원은 이미 이 기준을 만족했다.

 미국 입장에서 보면 모든 사안에서 한·일 갈등만 눈에 들어오게 마련이다. 그런데 갈등만 지나치게 부각되면 제 3자 입장에선 발을 빼고 싶어질 수 있다. 최근 한·미 외교장관 회담 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야스쿠니 얘기를 거론하지 않은 ‘케리 장관의 침묵’은 그런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택은 분명해진다. 지나칠 정도로 약아져야 한다. 현안과 관계없이 뭉뚱그려 갈등을 키우는 일은 일본을 오히려 도와주는 일이다.

 한 예로 위안부 소녀상과 관련해선 철저히 인권의 문제로 전환해야 한다. 일본의 주장은 미국에 있는 홀로코스트 기념비를 내려달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독일인들이 보기에 불쾌하다는 이유를 달아서 말이다. 이런 억지 주장을 단순히 한·일 갈등이란 차원으로만 접근한다면 일본의 전략에 말리는 것이다.

 교과서에 동해와 일본해의 이름을 함께 쓰자는 ‘동해 병기’운동의 경우는 더 세련된 접근이 필요하다. 현재 버지니아주 의회에 제출된 동해 병기 법안의 경우 통과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은 상황이다. 여야가 초당적으로 법안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일본 측의 반격이 시작된 징후가 포착되고 있다. ‘미주 한인의 목소리’ 피터 김 회장은 “일본 대사관이 법률회사와 계약해 조직적인 방해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주 의회 의원들도 “일본 압박이 상당한 수준”이라고 털어놓았다. 이제 할 일은 단합된 힘을 보이면서 동시에 절제된 로비를 펼치는 것이다. 동해 병기는 두 나라 모두의 주장을 배려하는 차원이라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정치권과 학계를 대상으로 한 외교전은 장기적 관점에서 진행돼야 한다. 이스라엘과 일본은 체계적 로비를 잘 하기로 유명하다. 우리도 긴 안목에서 친한파를 늘려가는 작업을 해야 한다. 이건 정권이 바뀌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미국에서의 한·일 외교전은 이제 시작된 거나 다름없다. 얼굴 붉히며 싸우는 것도 필요하지만 냉철한 접근이 어느 때보다 요구된다. 우린 ‘케리의 침묵’을 기억해야 한다.

이상복 워싱턴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