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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5)<제 32화>골동품 비화 40년(26)|박병래(제자 박병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위창·창랑의 서화>
전에도 말한바와 같이 나는 원래 도자기에 곁들여 서화를 모았기 때문에 그리 많지는 못하였다. 아마 1백점 내외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런데 1·4후퇴 때에 이 서화도 도자기와 함께 땅 속에 묻어 두고 피난길을 떠났다. 환도 후에 파보니 도자기는 말짱한데 서화는 습기가 차서 모두 못 쓰게 되었다. 먹과 종이가 함께 섞어 악취가 코를 찔렀지만 그 가운데 혹 쓸만한 물건이 남아있나 싶어 꼼꼼히 가려보았다. 그러나 겨우 몇 장을 골라냈을 뿐, 나머지는 문자그대로 휴지가 되고 말았다.
우선 기억에 떠오르는 물건으로는 오래 가지고있던 희원 이한철의 『죽변서옥도』라는 화첩이다. 원래 12장으로 되어있었는데 내가 그것을 입수했을 때 친구들이 아주 극찬을 아끼지 않기에 동자를 그린 것 1장을 손재형씨에게 주었다. 그랬더니 창랑 장택상씨도 꼭 1장을 달라고 떼를 썼다. 나는 창랑에게 난화를 떼어주었는데 그는 내가 손씨에게 준 그림과 비교해보며 그래도 불만의 뜻을 나타내었다. 나 보다 돈도 많고 서화도 많이 모은 창랑의 지나친 욕심이 밉기도 하기에 모르는 체 했지만 이와 같이 썩을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그때 선심이나 쓸걸 그랬다도 싶었다.
사실 우리나라 서화의 값을 올리는데는 창랑이 단단히 한몫을 하였다. 어떤 경매에서 추사의 대련이 나왔는데 당시 백원대에 머무르던 물건을 창랑은 2천4백원에 낙찰시켰다. 그 자리에서는 모두 어리둥절하였다. 심한 경쟁자도 없는데 그런 값을 부를 필요가 있을까 하고. 그러나 다음부터는 그게 바로 시세가 되어 다른 사람들도 그 정도의 값에 활발한 거래를 시작하였다.
물론 창랑이 가지고있던 모든 추사의 글씨도 몇 배의 값이 나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이 계기가 되어 어지간한 서화가 나오면 상인들은 우선 창랑에게 보이게 되었다. 창랑이 고 미술품을 좋아했던 것은 사실이며 그 감식안도 남에게 뒤지지는 않았지만 그가 이와 같이 파격적인 값에 그 대련을 살 때에는 이미 뒤에 올 이와 같은 사태를 예견하고 취한 행동임에 틀림없었다.
사실 창랑은 흔히 볼 수 있는 부잣집 아들의 「타입」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돈 속에도 아주 밝은 수집가이었다. 물론 좋은 물건을 많이 샀지만 그것을 모두 자신이 갖는 것만은 아니었다. 가령 5, 6점을 사면 그것을 친구에게 소개하고 그 중에서 1, 2점을 사례로 받기도 하였다. 또 상인에게도 맞돈을 안주고 물건과 바꾸는 일도 있었는데 그에게서 받은 물건을 처분하자면 항상 상인이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친구끼리 창랑에게 왜 상인을 골탕먹이느냐고 하면 그는『누가 골탕을 먹여.저희들도 좋다고 해서 된 거래인데. 그리곤 뒤에 딴소리야. 장님이 개천을 나무라는 격인 바보의 말은 들을 필요도 없어』하고 웃어넘기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창랑은 좋은 조건으로 많은 서화를 갖게 되었다. 그래서 한번은 순전히 자기 물건만을 가지고 경매를 열었다. 앞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경매는 경성미술구락부에서 행하기 때문에 일본상인을 안 통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창랑의 경매일에 전혀 움직이질 않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3%의 수수료만 빼앗기고 그 물건은 모두 창랑이 도로 갖고 말았다.
말하자면 일본상인들이 톡톡히 창랑에게 보복을 한 셈인데 그래도 창랑은 끄떡도 안했다.
다시 내가 가졌던 서화로 이야기를 옮겨보자. 겸재 정선이 그린 금강산의 「구룡연도」 가 있었다. 겸재가 그린 금강산은 나도 수 십장을 보았지만 그 중에서도 이건 아주 걸작인 듯 싶었다. 지금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있는「만폭동도」와 비슷한 크기로 필치도 그와 흡사하였다.
나는 금강산도 골동만큼이나 좋아했기 때문에 전후 18회나 가본 일이 있지만 이「구룡연도」는 자연의 장관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이 보였다. 뒤에 단원 김홍도가 그린「구룡연도」도 보았지만 서로 특징이 있어 쉽게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의 명화이었다.
그러나 위창 선생의 추천으로 갖게된 물건에는 신선도가 많았다. 한번은 당신의 그림인데 나에게 차지하라고 말씀하셨다. 조그만 단원의 신선도이었다. 그 때 선생은 형편이 넉넉하지 못하여 이를 처분하려고 하셨다. 그러나 점잖은 처지에 상인에게 넘길 수도 없기 때문에 나를 부른 것이었다.
나는 그 그림을 보고 퍽 좋아했지만 한편으로는 은근히 걱정도 되었다. 대개의 시세를 모르는 바는 아니나 그대로 칠 수도 없고. 또 지나치게 많은 사례를 하면 그 어른에게 부담을 드리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었다. 한참 생각 끝에 쌀 한 가마와 돈 1천원을 보냈다. 그랬더니 다시 현재 심사정의 신선도 등 좋은 그림 몇 장을 보내셨다.
다시 사례를 할 수도 없어 그대로 송구스럽게 됐다는 인사로 끝내고 말았지만, 위창 선생은 항상 자신은 어려운 처지에 있으면서도 남에게는 후하게 대하기를 잊지 않았던 분이다.
환도후에 건진 몇 장의 그림가운데 그 신선도가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위창 선생을 대하는듯한 심경에 빠졌다. 그래서 피난 중에 대구에서 돌아가신 그 분을 위하여 다시 한 번 명복을 빌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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