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2)제32화 골동품비화 40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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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젓가락통·오줌통>
처음 철사며 진사에 대해 대강 알게되고 나면서부터 골동상에 가면 진사만 무조건 달랬다.
골동을 시작한 아주 초기에 한 일본인 골동가게에서 진사병을 하나 사왔다. 그것도 무턱대고 진사를 달래서 그대로 산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가짜였다.
그래서 주인한테 가서 그 병이 가짜니 물러달라고 했더니 『당신이 진사달랬지 언제 골동달랬느냐』고 하면서 마치 정신병자처럼 대들었다. 하도 무서워서 그냥 도망쳐버린 일이 있다.
그 뒤에 갖게된 10각의 백자필통은 참으로 희귀한 유래가 있는 귀물로 상당히 아껴오는 터이다.
근 40여년 전, 그러니까 먼저 말한 진사병을 살 무렵이었다. 하루는 지금의 단성사앞 냉면집을 들렀더니 젓가락을 꽂아논 사기그릇이 하나 있었는데 아주 좋아보였다.
자세히 보니 필통이었다. 필통에 마음을 두게되니 자연히 그 집을 자주 드나들며 만져보고 하게 되었다. 그래도 주인은 눈치를 못챘다.
해가 바뀌고 차차 골동품에 눈이 익숙해지니 그 필통이 과연 대단한 물건임을 알게되었다.
이러는 동안 주인도 눈치를 채고 젓가락통을 바꾸고 그 필통을 감추었다. 그때부터 거간인 김준명씨에게 바짝 졸라서 어떻게 해서든지 사달라고 했다. 결국 몇해만에 그 아들을 꾀어내어 3백원에 샀다. 그게 바로 양력 섣달 그믐날이라서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김수명씨에게는 구전을 한푼도 안줬다.
그후 상당한 세월이 지난 후의 얘기지만 이런 일화가 있다. 즉 김중화 박사가 한번은 내게 골동을 사달라고 부탁을 했다. 김중화씨는 골동수집의 출발이 나보다 늦었던 까닭이다.
그때 내가 나서서 물건을 골라주고 감정해주고 하면서 중간에서 다리를 놓아 김수명씨가 팔도록 했다.
그 중에는 상당히 값진 물건도 많았고 나 역시 탐이 나서 가령 닭연적이나 붕어연적, 그리고 감항아리 등이 갖고싶었다. 물건은 전부 12만원어치였는데 김중화씨는 내가 그렇게달라는 감항아리는 안주고 고맙다고 하면서 잔대 하나만 집어주었을 뿐이다.
그런데 김씨의 아들이 감항아리를 자전거로 운반하다가 넘어져서 폭삭 깨뜨리고 말았다.
또 한번은 나를 자주 찾아오는 환자의 어린애가 아프다고해서 왕진을 간일이 있다. 진찰해보니 신장염이었으므로 아이의 소변을 검사하겠으니 오줌 받을 병을 하나달라고 했다. 그는 마루 밑을 뒤져 병을 가져오는데 보니까 청화백자 소병이었다. 병원에 돌아와서 오줌을 쏟고 말끔히 소독을 한 다음 그 아이의 부모가 오기만 기다리다가 나타났을 때 병을 가져가라고 했더니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럼 이것이 값이 나가는 골동인데 내가 가져도 괜찮으냐고 물으니 그냥 가지라고 했다.
실은 그냥 모른척하고 갖고도 싶었지만 명색이 천주교인인 내가 남의 물건을 무단으로 갖고 값도 안치러서는 안될 것 같아 얘기만은 한 것이다. 나는 원래 골동을 모으기 시작할 때부터 이것을 돈으로 바꾸거나 모아서 재산을 이루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못했다. 워낙 모으는 단위가 대규모 수장가보다는 작았으므로 목돈이 되리라고는 절대로 생각지 않았다.
이것은 다시 해방전의 이야기인데 골동장에 나온 네모진 난분을 50원주고 사려고 하였다. 그랬더니 그 주인인 일인이 비싼 것을 사서 겨우 12원짜리 난초를 심겠느냐 하면서 고려 때의 종이 있는데 이것을 사라고 했다. 그때 산 고려종은 여태까지 가지고있지만 그 종을 사지 않고 화분을 샀었더라면 지금 굉장한 값이 나갈 것이다.
6·25때는 상당한 수난을 겪은 것이었지만 간접적으로 말한다면 골동 때문에 살았다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골동덕분에 지은 집의 다락이 워낙 크고 밖으로 보아서는 전연 표가 나지 않아 그 속에서 은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전란의 북새통을 치르며 골동품을 간수한다는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람이 살기조차 힘든 형편에 골동을 보전한다는 것은 일견「난센스」에 속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버릴 수도 없었다.
그래서 사랑채 바깥에 있는 마당에 몇 길이 넘는 구덩이를 팠다. 그런 후에 모래를 깔고 거기에 가지런히 골동을 놓았다. 그 위에 모래 한 겹을 덮고 다시 골동을 놓는 식으로 해서 전부를 파묻었다. 맨 위에는 간장이며 여러 가지 살림살이에 쓰이는 항아리를 놓고 묻었다. 피난을 하고 돌아와 보니 간장을 비롯해 독 속에 들어있던 여러 가지 내용물은 말끔히 비어있었으나 그 밑에 파묻었던 골동은 하나도 다친게 없었다.
여러 해 전에 나의 병원에 입원했던 환자가 김치를 담가놓은 항아리 하나를 갖고 왔다. 자세히 보니 청화백자였다. 나는 그것이 하도 탐이 나서 그 방에 들어가면 은근히 눈길을 그리 보내곤 했다. 결국 환자는 죽고 말았지만 그 항아리는 내가 갖게되었는데 약간 마음에 걸리는데가 없지 않다. 소사의 수도원에 있는 수녀가 땅을 파다가 캐낸 백자 사발을 갖다준 일도 있다. <계속><제자 박병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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