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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1)제32화 골동품생활40년(22)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생각나는 외인 수집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구설이 따르나 나의 생각으로는 영국인 「가스비」가 청자의 값을 많이 올려놓았고 역시 영국인인 「버너드·리치」는 백자의 예술성을 크게 선전한 사람이라고 본다. 「버너드·리치」는 천천형제와도 가까와서 형인 백교가 동경계명구락부에서 「이조의 백자」란 제목으로 강연한 내용을 본국에 돌아가 출판한다고 하기까지한 모양이다.
일설에 의하면 자진궁이라는 대만인이 서울에서 일경 경부로 근무하면서 월급만 타면 조선백자를 모으기 시작한 최초의 백자수장가였다고 하나 확인할 길은 없다. 그러나 앞서도 말한 천천백교가 처음 백자에 눈을 뜬것은 확실하다.
그가 일본 본원사에서 비장하고 있는 명물다완이 실은 우리 나라에서 건너간 것임을 밝힌 최초의 일본인이다.
1932년 「버너드·리치」는 우리 나라에 와서 회령의 금지까지 견학하고 돌아간 열성파였다. 그는 이조백자 항아리하나를 본국으로 가지고 가면서 『이것을 본국에 가져가는 것이 나에게는 더 없는 행복』이라고 말했다.
그가 경성대학 좌담회에서 동양도자의 특색을 들어 한국은 선이고 중국은 색채이며 일본은 모양이라고 했을 때 나는 매우 감격했다. 일후 그 말이 도자의 초심자인 나에게 큰 길잡이 역할을 했다.
오평무언은 『조선개국교섭시말』의 저자로 경성대학 법문학부에서 외교사를 가르치던 교수였다. 영국에서 갓 돌아온 그는 상당한 「인텔리」였는데 호사취미로 자기연구에 열을 올려 전문가 못지않는 실적을 쌓았다.
오평 교수와는 나도 간혹 접촉이 있었다. 대개 우리 윗과계통 사람들과 법과선생들과는 그리 빈번한 왕래가 없어 가령 법문학부의 등총린이 추사를 연구한다든지 하는 정도만 알고 먼발치에서 경원하는 처지였다. 그랬건만 오평 교수와는 골동을 같이 산 일도 있다. 그는 좀 키가 크고 멋없이 싱거워 보이는 사람이었다.
한번은 골동상에 갔더니 오평 교수가 물건을 흥정하다 말고 입을 벌리지 말라는 시늉으로『쉬쉬』하길래 알고 보니 과연 대단한 물건을 사 가지고 나가는 것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금니 즉 금박을 넣은 고려청자사발을 사 가지고 나가는 것이었다. 가격도 파격적이어서 40원이었다.
이 물건은 내력을 알고 보면 실로 대단하다. 하도 사치를 극한 물건이기 때문에 『고려사』에 나올 정도다. 이에 의하면 고려에서 해마다 원에 공물을 바쳤는데 어느 때인가 이 금박이든 청자를 보냈더라 한다. 원의 세조가 그 기가 막힐 정도로 호사스러운 아름다움에 그만 눈이 휘둥그래졌지만 다음부터는 이렇게 사치스러운 물건을 보내지 말라고 일렀다는 얘기다.
개성 밖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물건이었다.
아쉽게도 기록에만 있을 뿐 오늘날까지 금니로 음각한 청자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한 물건을 샀으니 오평 교수도 상당히 흥분하지 않을수 없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는 그것을 차완으로 쓰려했던 것 같다. 얼마 후에 나도 그와 똑같은 금니가 든 술잔 즉 국배하나를 사게 되었는데 오평의 것이 월매를 그린 사발인데 비해 내 것은 그저 아담한 술잔이었다. 나는 다른 골동상에서 그것을 10원주고 샀다. 물론 오평이 내가 그 술잔을 산 사실은 알 턱이 없다.
하지만 나의 추측으로는 오평의 밥사발과 나의 술잔이 필경 한쌍일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그것을 만든 도공이 같은 사람은 아니더라도 전세품이나 출토품인 경우 같이 한 쌍으로 묻어 다니다가 세상의 햇빛을 본 것임에 틀림없다. 물론 오평 교수는 모르는 것이지만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한 역시 이것도 한 인연이 아니었나하고 생각하는 터이다. 그는 당시에 주조실록을 가장 많이 열독한 사람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그 때문에 그때까지 수수께끼로만 전해져왔던 분청사기 속에 명문이 들어가게 된 내력을 밝혀냈다. 오평은 그후 얼마 있다가 본국으로 돌아가서 일찍 작고하고 말았다.
경성대학 의학부 병리한 교실에 있던 소삼씨도 상당한 양의 수장품을 갖고있었다. 대개 그 당시에도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대학교수는 역시 봉급생활을 했으므로 큰 규모로 모으지는 못했다. 소삼 교수는 특히 연적에 일가견이 있었는데 그가 모은 것 가운데 조개껍질모양으로 생긴 연적은 나도 처음 보았거니와 상당히 희귀한 물건으로 나중에 한국사람에 맡겼던 바 그가 팔아먹고 말았다.
그밖에 의학부의 삼후 교수나 대택 교수 등이 상당히 많이 모았었다. 대택 교수는 나보다 여러 해 손위인데 아직까지 생존해있다. 근간에 들리는 소식으로는 내가 그동안 많은 물건을 수장했을 텐데 꼭 한번 와서 보고싶다고 했다는 것이다. 대택 교수는 특히 불상과 벼루를 많이 모았고 의학부의 안과주임 조야는 안경을 주로 모았다.
얘기가 잠깐 빗나갔지만 「프랑스」사람 「마텔」은 지금 4·19도서관 자리에 살았다. 그이도 상당한 물건을 갖고 있었다. 해방 후 한번은 돈이 달리는지 나에게 백자항아리를 하나 사라고 해서 샀더니 그 돈으로 여행을 하면서 잘 놀고 온 모양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패혈병으로 작고했다.
해방 후 군정청에 있던 「조지·기포드」중령도 상당한 열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가 한약국의 예재상처럼 서랍을 죽 만들고 그 안에 각지에서 모아온 도편을 분류해 넣어둔 것을 보았다. 그때에 천천백교도 아직 한국에 남아서 같이 다니면서 보조를 한 모양이었다. <계속><제자 박병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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