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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9)제32화 골동품비화40년(20)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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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유종열과 천천형제>
유종열 하면 일제시대를 경험한 장년이상의 인사에게는 퍽 친애의 감정을 가질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일본사람은 임진왜란이래 우리에게서 무엇이고 가져갔고 정신적·물질적 피해만 입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유종열은 달리 생각할지도 모른다.
심지어 여학생조차도 유종열과 광화문에 대한 얘기를 알고 있다. 이 유종열이 민예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그랬던 것으로 알지만, 하여간 자기 나라인 일본에서 종교가로 알려진 것보다 우리 나라에서 이조백자의 진가를 처음으로 밝힌 사람으로 더 알려져 있다.
사실이야 여하튼 내가 유종열을 만난 얘기를 우선 하기로 한다. 1930년에 와서 경성「호텔」(지금 세종「호텔」의 건너편에 묵은 유종열은 좌담회도 열고, 당시 우리 나라의 문학인들과 두루 만난 적이 있다. 나도 그를 그때 처음 만났다.
인상으로는 욋가의사인 김성진 박사를 닮은 데가 많았다.
그래서 착각을 하고, 아니 김 박사가 웬일인가 하고 어리둥절하다가 보면 그게 아니라 바로 유종열이었다. 그는 얘기할 때 하도 열변을 토하기 때문에 침이 퇴퇴 튀어서 가까이 있기가 민망스러웠다.
전체적으로 한 얘기 가운데 골동얘기가 대부분이었다. 그때 여기에 와서 상당한 양의 민예품도 사갔는데 도자기는 조선의 훌륭한 문화적 유산이니까 조선인이 잘 보관해야 한다는 얘기를 거듭 강조했다.
하지만 유종열이 도자기나 골동에 대해서는 전문적인 식견은 깊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도자기 화로를 샀을 때는 어쩐지 수치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즉 골동상에서 내가 10원도 비싸다고 안산 화로를 그가 12원을 주고 사면서 싸다고 했을 때 그런 생각을 한 것이다.
그때 유종열의 부인인 겸자 여사도 따라와 공회당(지금 소공동의 상공회의소)에서 음악회를 열었다.
그는 자기가 산 물건을 전부 경복궁의 집경당에 있는 민속미술관에서 전시한 바 있다.
3·1운동이 일어난 이듬해 유종열은 잡지『개조』에 「조선의 친구들에게 주는 글」이란 제목으로 기사를 써서 고립무원의 우리 민족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보냈다는 얘기도 있다. 나로서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이 삭제된 그 내용은 대개 예술을 통해 두 민족의 우애가 증진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는 것이다.
과학상의 기술이나 정치적인 지식으로 우리 나라를 통치하려는 일제를 측면으로 비판하고 종교와 예술을 통해서 내면의 이해를 촉구했다고도 하다. 즉 일본이 우리 나라에 군대와 거만금을 보내서 통치할 것이 아니라 소천팔운이 같은 인물을 보내는 게 어떻겠느냐고 얘기했다 한다.
소천팔운은 명치 중기에 일본에 희귀한 영국인으로 본명은 「라프카디오·헌」이라 하였다. 그는 일본여자를 데리고 살며, 당시 아직 소개가 덜된 일본을 서구 사회에 알린 인물이다.
우리의 민예는 유씨의 소설에 따르면 『억압당한 운명의 고요한 정적이 깃들이고 마음의 저 깊은 속에서 우러나는 생명이 소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비참한 운명을 누대로 겪은 조선은 예술을 통해 군왕의 위치』에 올라설 수 있었으며 우리 나라의 예술은 중국의 모방이 아니라 민족의 고유한 소성의 발로라고 했다.
유씨와 더불어 떼어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천천형제이다. 형인 백교는 한일합방5년 후인 1914년 소학교 교원으로 이 땅에 와서 남대문국민학교 교장으로 있었고, 그 동생 교는 그 얼마 후에 건너와 청량리 임업시험장에서 촉탁으로 근무했다.
형은 원래「로당」을 좋아해서 조각을 지망했다고 하는데 우리 나라에 와서 도자기에 심취하면서부터 백자에 뜻을 두고 연구하게 되었다. 그는 주로 도보여행을 하면서 전국요지를 두루 편력한 것 같다. 그래서 『이조의 도자』라든지 동경에서 열린 계명회의 강연회에서 백자를 상당히 소개한 모양이다.
그의 동생 교는 숫제 한복차림으로 나다닐 때도 있었다. 그는 해방 전에 이곳에서 죽었는데 죽을 때에도 『조선의 흙이 되게 해 달라』고 했다는 얘기다.
경성대학의 철학교수였던 안배능성이 추도문을 지었다는 감상적인 일화가 있다. 교는 『이조의 선』, 즉 목공예품인 소반을 연구해서 책으로 썼으며 『이조도자명고』라는 책도 냈다.
물론 유종열이 서문도 써주고 후원을 해주었다. 유씨와 천천형제가 한 일 가운데 공로로 친다면 경복궁내 집경당의 민속박물관을 들 수 있는지 모르겠다.
굳이 유씨와 천천형제에 관한 얘기를 꺼낸 것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이조백자, 그 중에서도 백자항아리에 상당한 온정을 품고 민예로서 뿐만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예술로서 정당히 평가하려한 노력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편협한 소견에서가 아니라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할 때 우리는 자기네 동족이 빚은 침탈도 그처럼 어려운 고경에 빠졌었기 때문에 몇몇 양심적인 일인들의 양식이 돋보인 것 뿐이다.
유씨가 「라프카디오·헌」의 미거를 비유했다고 하나 「헌」의 본국인 영국이 일본을 침탈한 것도 아니었으며 일본은 그때 러일전쟁에 승전을 거두고 동양제패의 야심이 무르익는 강자의 입장에 있을 때이다.
유씨나 천천형제는 「라프카디오·헌」의 몇 곱절이 넘는 노력으로 보답하는 대신 오히려 감상적인 온정이나 동화의 주장을 유리를 한층 비하하는 결과가 되지 않았나 싶다.<계속>【박병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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