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과 역사의 인류학적 의미|소설『태풍』을 읽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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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중앙일보에 연재 중이던 최인훈씨의 역작장편 『태풍』이 13일(일부지방 14일) 2백43회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이 소설은 신문연재소설로는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문제의식을 제기하여 연재 중 폭넓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최근 『한국문학사』『한국근대 문예 비평사 연구』 등 무게 있는 저서를 내놓은 문학평론가 김윤식씨는 일제시대 의식극복방식의 새로운 유형을 제시하는 등 여러 가지 관점에서 『태풍』이 문제작임을 확인하는 글을 보내왔다. 최인훈씨의 「바통」을 이어받은 최인호씨의 새 연재소설 『내 마음의 풍차』에 대한 계속적인 성원을 기대하면서 김윤식씨의 글을 싣는다. <편집자주>
한 작가는 자기가 소속된 나라의 문학사적 문맥 속에 편입되면서 동시에 자기자신의 세계를 구축한다. 이 경우 문학사적 문맥이란 그 사회의 문학적 「높이」를 뜻한다. 적어도 문학에서 불쑥 천재가 나온다든가 걸작이 씌어질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최인훈씨의 작품 『태풍』도 이 원칙에서 벗어날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이 작품을 검토하려면 이 작품을 우선 한국문학사의 문맥 속에 놓아야하고 그 다음엔 작가 최씨의 문학적 생애의 문맥에서의 높이를 측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전자의 문맥에서 보면 식민지(일제)시대 의식의 극복에 관계된 작품 군에 이어지는 것이며 후자의 문맥에서 보면 『열하일기』(최씨의 중편) 『두만강』(중편)에 연속된다. 『회색인』『서유기』라는 두 장편으로 이 작가의 6·25(분단문제)를 주제로 한 한판의 바둑판이 끝났을 때 그 끝매김으로 단편이 시도되었다. 그것이 소위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계열이었다. 이 단편계열의 핵심에 놓인 방법론이 이른바 문화사적 안목이었다.
이 경우 문화사적 안목이라 함은 한국적 현실의 저 층에 놓여있는 의식의 구조에 대한 언어적 포착이었다. 작품 『태풍』은 바로 여기에 연결된다. 『태풍』은 세 가지 점이 문제된다.
첫째는 일제시대 의식의 극복방식의 새로운 유형일 수 있다. 문학에서 식민지의식의 극복은 일제에 대한 저항, 그것을 백의민족의 역사전개의 「에너지」로 드러냄이 한국문학의 통념이었고, 이 방법은 서사적 공간획득, 시적 감동성 등등 감정환기에 속하며, 문학고유의 힘을 발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방식은 자칫하면 새로운 「식민주의」에 극히 안이하게 영합해버리기 쉽다. 구호로 반일감정을 떠드는 그러한 극단적 분노의 방법으로 쓴다는 것(가령 최근의 모씨의『교육 칙어』 따위의 소설)은 및 TV「드라머」에서 왜놈순사는 무조건 악역으로 나오는 투처럼 오히려 가장 타협하기 쉬운 함정을 지닌다. 이와는 다른 방법이 필요할 수도 있다.
『태풍』이 바로 그것이다.
즉 인류학적 방법론으로 민족과 역사를 분석하는 일이다. 달리 그것은 과학적 방법이라 할 수도 있다.
둘째로 이러한 인류학적 방법시도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배경(세팅)을 요청하게 된다. 작품의 「표면상」의 배경은 「아이세노딘」의 「로파그니스」이며 주인공은 「나파유」군인인 「애로크」출신의 「오토메나크」중위이다. 그리고 남십자성과 짙은 열대식물의 원색으로 펼쳐진다.
그러나 이러한 표면상의 도식을 다음처럼 바꾼다면 1943년 무렵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때의 서울의 상황 그대로인 것이다.
즉 「아이세노딘」은 「인도네시아」를 거꾸로 표기한 것이며 「로파그니스」는 「싱가포르」이며 「나파유」는 일본이며 「애로크」는 「코리아」(한국) 「오토메나크」는 「가네모도」(금본)이다. 그리고 거기 나오는 애국투사 「카르노스」는 물론 「수카르노」수상이다.
어째서 이런 복잡한 수수께끼 식으로 작품배경을 설정했느냐고 물을 때, 이 물음 자체가 곧 이 작품의 방법이 인류학적 관점에 의거했음을 뜻한다. 「나」「우리민족」「우리국가」의 관점에서 관찰할 때, 그 「민족」「국가」는 객관적분석이 거부되기 쉽다. 심정적(Gemuitlich)차원에서 형상화가 진행될 때 이 함정을 극복하기란 실로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심정적 방법에 주로 의거해 온 것이 오늘날까지의 한국문학의 버릇(관례)으로 파악된다. 이 버릇을 깨뜨려야할 명분이 지금쯤 절실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반일감정이 이 시점에서야말로 심리적 차원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분석될 때라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 진술은 물론 작품 『태풍』이 성공작이라는 것과는 무관하다. 다만 중요한 의미를 띤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셋째로, 방법론이 결정한 이 작품의 문체에 관계된다. 내 생각엔 이 문체는 최씨의 방법론에 희생된 것 같다. 인류학적 문체가 확립되기에는 보다 많은 계산이 요청되어야 할 것이다. 어째서 자기 투의 「아포리즘」적 문체, 그리고 시적 문체가 도처에 깔려 있는가. 바로 이 점이 이 작품의 방법론을 흐리게 했고, 주제의 모호성을 초래한 것이다.
「로파그니스-30년 후」장은 사족이다. 아마도 이 작가의 「고의적」실수인 것 같다. 그것은 발표 지에서 연유된 제약성과 무관하다. [김윤식<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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