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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방천시장의 애달픈 양식, 경제보다 힘센 김광석의 노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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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호 기자 중앙일보 팀장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손민호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대구 대봉동 방천시장에 가면 김광석 거리가 있다. 시장통 맨 왼쪽, 한쪽 방향이 높이 3m는 족히 넘는 축대에 가로막힌 350m 길이의 골목이다. 벽을 따라 김광석을 소재로 한 벽화와 조형물 70여 점이 있고, 온종일 김광석 노래가 흐른다. 지난 6일 저녁에는 기일을 맞아 조촐한 추모 콘서트도 열렸다.

 주말이면 이 비좁은 골목에 1000명이 넘게 모인다. 거리 복판의 호떡집은 말 그대로 불난 호떡집이 되고, 벽마다 김광석 사진을 붙인 시장통 고깃집에서는 밤늦도록 김광석 노래가 메아리친다.

 방천시장은 광복 직후 형성됐다. 대구를 남북으로 가르는 신천의 제방 아래에 있어 방천(防川)시장이다. 예부터 싸전이 유명해 한때 점포가 1000개를 넘었다. 그러나 현재 점포 수는 고작 70여 개다. 2000년께부터 진행된 재개발사업이 지지부진하면서 하나 둘 시장을 떠난 결과다.

 방천시장은 2010년 11월 문화체육관광부의 ‘문전성시 프로젝트’에 선정되면서 활로를 찾았다. 문전성시 프로젝트는 문화의 힘으로 시장을 바꿨다. 작가 27명이 달라붙어 쇠락한 시장에 예술의 옷을 입혔다. 그때 찾아낸 방천시장의 문화 아이콘이 김광석이다.

 3년 전만 해도 평균 연령 60대의 상인들에게 김광석은 낯선 이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칠순 언저리 어르신도 ‘서른 즈음에’를 웅얼거린다. 신범식(67) 상인회장은 김광석 프로필을 줄줄 외우고, 시장에서 ‘찌짐이집’을 하는 박종구(61)씨 내외는 김광석 거리의 사진작품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의 모델로 서기도 했다.

 김광석은 1964년 1월 22일 대구시 대봉동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신작로가 나고 백화점이 들어서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지만, 시장 건너편 백화점 주차장 구석에 김광석이 살았을 것으로 상인들은 짐작한다. 김광석은 다섯 살까지 대구에서 살다 서울로 올라갔다. 초등학교 때 대구 할머니집에서 잠깐 살았다지만, 김광석과 대구의 인연은 이게 전부다. 김광석이 방천시장을 추억하는 노래를 부른 적도 없다. 그리 내세울 인연이 못 된다는 얘기다.

 사실 방천시장이 낳은 인물은 따로 있다. 한국전쟁 직후 방천시장에서 신문을 배달하며 네 식구를 먹여살린 열네 살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다른 신문팔이보다 빨리 신문을 배달하려고 신문 값을 후불로 받았고, 그 덕분에 방천시장의 신문팔이 시장을 독차지했다.

 그 소년의 이름이 김우중이다. 왕년에 세계를 경영한다고 큰소리쳤던 대우그룹 회장 말이다. 방천시장과 맺은 인연만 보면 김광석보다 김우중이 더 질기다. 그러나 방천시장은 지금 김광석으로 먹고산다. 김광석은 방천시장의 ‘애달픈 양식(樣式)’이고 소중한 양식(糧食)이다. 문화가 경제보다 힘이 세긴 센가 보다.

손민호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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