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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0)<제32화>골동품비화 40년(1)|박병래(제자 박병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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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해부제 지내던 날
의업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온 50년 동안 골동수집에 취미를 붙이지 못했더라면 내 인생은 한결 삭막했으리라고 믿는다. 한창「골동 광」소리를 들을 정도로 열이 올랐을 때에는 오전에 병원일과를 마치고는 「가운」만 벗은 채 그대로 시내 골동 상을 돌고 꼭 한가지를 사들고 돌아와야 그날 밤에 편안한 잠을 이를 수 있었다.
물론 좋은 것을 사게되면 머리맡에 놓고 자다가 한밤중에 일어나 불빛에 비추어 보곤 했는데 보통 한 보름 가량은 흥분 때문에 잠을 설치기가 일수였다. 골동에 손을 댄 40여년 동안 나는 남과는 달리 하찮은 물건 하나라도 다시 내놓거나 만일이 없이 전부를 수장해 왔다. 근년의 얼마를 빼놓고 평생 봉급생활을 했으므로 여느 호사가와는 달리 탐나는 물건과 주머니와의 「밸런스」를 생각해야했다. 대신 일단 점을 찍은 물건은 몇 달이고 쫓아다니면서 내 손에 넣고 말았으니 누구나 그 열성에 기울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골동에 취미를 붙이게 되니 처음에는 차디차고 표정이 없는 사기 그릇에서 차츰 따뜻한 체온을 느끼게 되었고 나중에는 다정하고 친근한 마음으로 대하게 되었다. 또 고요한 정신으로 도자기를 한참 쳐다보게 되면 그릇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까지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지다.
취미라는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4O여 년 전에 나는 도대체 골동품을 모으는 것이 어떻게
취미가 되는지 이해가 안 갔다. 뿐더러 골동품에 흥미를 갖게된 것도 아주 우스운 일을 계기로 해서 비롯한 셈이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일인들이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보인 골동품 수집 열은 대단한 것이었다.
합방을 전후해서 일본인 무뢰한들이 고분을 뒤지고 호사가는 호사가대로 헐값에 고귀한 미술품을 거두어간 사실은 차차 얘기하겠지만 일부 지식층, 그리고 대학교사나 심지어「딜리랜트」마저 무엇이건 하나씩 모으는 취미는 다 가졌었다.
1929년 무렵으로 기억한다. 경성대학부속병원 내과산실조수로 야판 조교수 밑에서 일을 보고 있었다. 그 당시 의학계에서는 1년에 한번씩 꼭 해부실에서 조각조각이 나서 없어진 이름 모를 시체의 영혼을 위로하는 해부 제를 지내게 마련이었다.
야판 교수는 그해 일본의 고야 산에서 해부 제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접시 하나를 샀다. 야판 교수가 그 접시를 내보이며 『박군, 이것이 무엇이지』하고 묻는 것이었다. 그저 평범한 골동접시가 아니냐고 반문 조로 대답했더니 그게 아니라 어느 나라 물건이냐고 했다. 나는 그 물음에는 그만 말문이 탁 막히고 말았다.
어물어물 조선 것은 아닌 듯하다고 했다. 그랬더니 야판 교수는 정색을 하면서 『조선인이 조선의 접시를 몰라서야 말이 되느냐』고 하는 게 아닌가. 그 말을 듣는 순간 별로 수치스러운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한데 그와 헤어지고 나서 곰곰이 생각하니 분한 마음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며칠을 궁리하던 끝에 남처럼 골동에 대해서 무엇이든 알아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마침 창경원의 수위와 안면이 있는 터였으므로 무료 입장을 할 수 있어 매일 당시의 유일한 박물관이던 이왕직 미술관을 드나들게되었다. 미술관을 드나들면서 새파란 고려의 청자와 하얀 이조백자를 들여다 볼 때마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우리 조상들의 손재주가 저렇게 뛰어난 것을 이제껏 모르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까닭이다.
대학병원의 건너편에 있던 미술관에 매일 드나들게되니 마냥 같은 물건만 보게 되어 나중에는 싫증도 나려니와 대학선생들이 주로 골돌 상을 드나들며 새로운 물건만 나오면 냉큼 사는 것을 보고 나도 무엇인가 안목을 넓혀야겠다고 작정을 했다.
그래서 하루는 단단히 별러서 「천지」라는 일인 골동 상을 찾아갔다. 대뜸 그는 대판사투리로 묻기를 『골동에 관심을 가지게되면 두 가지 길이 있는데 어느 쪽을 택하겠느냐』 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두 가지 길은 무엇 무엇이냐』고 했더니 『하나는 학연연구이고, 또 하나는 취미』라고 했다.
학술연구는 도서관과 요지를 돌면서 두루 견문을 넓히는 것이겠으나 취미란 도대체 무엇인지 이해가 안 갔다. 하루는 골동에 관계하는 환자가 하나 찾아 왔길래 그에게 물어보니 역시 취미라는 것이다. 골동품을 고치는 집에 가서 물어도 역시 취미라고 대답했다.
그 당시 나는 어느 생명 보험회사의 촉탁 의를 겸하고 있었는데 그 회사사원이 청자와 백자에 대해 상당한 식견이 있었으므로 그에게 물어보니 그렇게 궁금해 할 것만은 아니고 사보면 안다고 했다. 우선 고려자기를 사보기로하고 그 당시에도 가짜가 많이 나돈다는 소문이 있었으므로 멀리 부여에 가면 가짜가 없을 줄 믿고 그리로 내려갔다.
고려청자 주전자 하나를 10원 주고 사고 깨어진 책 기왓장 몇 개를 5원에 사들고 왔다. 물론 그리 썩 좋은 물건은 아니었으나 하여간 그 당시 가령 뚜껑이 깨진 50원 짜리란 동 사기 그릇을 하나 사면 수리하는데 적어도 10원이나 20원이 드는 시대였으니 오늘날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내가 산 고려자기만 해도 고치는데 18원이었으니 배보다 배꼽이 큰 셈이었다. 기왓장도 고치려했더니 이런 것은 고치는게 아니니 그대로 가지고 가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사들이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취미를 붙일 수가 없고 그 말의 뜻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무엇이든 목표를 세워서 막 사들이기로 하였다. 우선 접시를 목표로 삼아서 막 사들였다. 접시고 잔대 고간에 가리지 않고 사들였다.
그러다가 차차 요령이 생기게 되니 그제서야 취미란 말을 깨닫게 된 것이다. 즉 시대와 선호를 구별해가면서 물건의 가치와 그것을 완상하는 안목이 생기게된 셈이다. 그렇게 되면서부터 차차 골동을 아는 사람들과 동악「그룹」을 짓게 되었고 매일 만나는 일이 하나의 일과처럼 되었다. 전날 내가 무슨 물건을 사게되면 그 다음날 모여서 반드시 그 물건에 대한 품평회 비슷한 간담을 나누는 게 일종의 낙이 된 셈이다. 접시에서 시작해서 연적·필통 등의 문방구를 수집하기 시작했는데 점점 가경에 접어드니 백자의 진가를 참으로 깨닫게되고 이 세상에 이와 똑같이 좋은 물건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나의 골동인문 경위이다. <계속>

<필자소개>
1903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 1924년 경성의전을 졸업한 뒤 현 서울대학부속병원의 전신인 조선총독부 병원에 근무, 경성대학부속병원의 내과학 교실 부수·조수를 거쳐1936년 성모병원을 창설, 원장에 취임. 동란 중에는 공군에 입대, 병원장·의무감을 역임. 제대 후 다시 「카톨릭」의대학장 겸 성모병원장. 1957년 개인병원으로 성「루카」병원을 경영. 1972년 은퇴. 흉곽내과, 특히 폐결핵 치료에는 권위자로 아직도 그 방면의 신화적인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일찌기 한국 고 미술품에 흥미를 느껴 깊은 연구를 쌓는 한편 백자를 주로 한 수백 점의 자기를 모아 굴지의 수장가로 알려진바 있다. 따라서 필자가 걸어온 길이 한국골동사의 뒤안길이 된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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