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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국적 이젠 다시 볼 때다] 下. 정서냐 실리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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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중앙일보의 '이중국적-이젠 다시 볼 때다'시리즈가 나간 뒤 미국 뉴욕의 모바일 정보통신 업체에 근무한다는 이민영씨는 취재진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e-메일을 보내왔다.

"공직에 임명된 본인이 이중국적을 갖고 있다면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합법적으로 일정 기간 이중국적을 유지할 수 있고, 성인이 된 후 국적을 선택하도록 보장하는 나라에서 자녀가 본인이 원하는 국적을 선택한 것을 두고 부모에게 잘잘못을 묻는다면 모순이다."

그는 "국적은 개인별로 구별되지 가족별로 구별되지 않으며, 개인이 어느 국적을 선택하든 그것은 개인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연좌제'처럼 가족 전체에게 책임을 지울 성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반대 의견도 있다. 고계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정책실장은 "자녀나 본인이 이중국적인 사람이 하위 공직자이거나 전문직이라면 문제가 없으나 그런 사람에게 지도적 위치에서 국정을 책임지는 자리를 맡기는 것은 무리"라고 말했다. 고위 공직자만 아니면 이중국적이 문제가 되지 않지만, 국정을 좌우하는 자리라면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디가 'choi88'인 한 네티즌도 "중앙일보의 시리즈 내용에 대체로 동의하지만 결정적 시점에 투철한 애국심이 필요한 장관.총리가 외국인일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다른 나라들은 어떤가.

세계적 추세는 '개방형'으로 흐르고 있다. 국가 이익을 위해서라면 고위 공직에도 국적의 경계를 허물어 문호를 열고 있다.

프랑스의 장피에르 라파랭 총리는 지난 1월 독일 각료 한 명을 프랑스 내각에 입각시키겠다고 선언했다. 독일도 같은 조치를 취할 계획이다. 더 나아가 양국은 6개월에 한 번씩 두 나라의 각료 전원이 참석하는 공동 각의도 개최하기로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국적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있다.

지난해 6월 월드컵 4강의 꿈을 이루자 히딩크에게 한국 국적을 주어 계속 국가대표팀을 맡기자는 제안이 나왔다. 지난달 대통령직 인수위에는 제프리 존스 전 미국상공회의소 회장을 외교통상부 장관 후보로 천거하는 추천장이 접수되기도 했다. 인재라면 외국인도 데려 와서 쓰자는 얘기다.

민간 부문에서는 국적 논란이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1984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한 면역학자 넬스 K 예르네는 수상 당시 영국.덴마크.스위스 삼중국적자였다. 세계적인 문화사회학자인 페터 지마는 네덜란드와 오스트리아 국적을 동시에 갖고 있다. 물론 이들의 예는 '세계 시민'이라는 점에서 차원이 다르지만 '애국심'이라는 측면에서 국적이 걸림돌이 되지 않는 사례는 얼마든지 많다.

적국과 인접한 나라들도 국적에 유연한 입장이다. 아랍국가들에 둘러싸인 이스라엘, 중국과 대치 중인 대만, 파키스탄과 긴장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인도는 자국민이 원하면 외국 국적을 인정한다.

배경은 두 가지다. 무엇보다 '인력 이동'시대에 인재의 유출을 막기 위한 것이다. 신흥 정보기술(IT) 강국으로 떠오른 인도도 인재들이 미국.영국 등으로 빠져나가자 이들에게 이중국적을 용인하는 한편 해외 지역별로 단체를 결성하도록 주선하고 있다. 이들 단체는 첨단 외국 기술과 자본.투자를 유치하는 창구가 되고 있다.

다른 하나는 '국적=애국심'은 아니라는 인식이다. 설령 단일 국적주의로 이들을 묶더라도 마음에서 우러나 나라를 사랑하지 않으면 유사시 국민적 결속은 모래성처럼 무너진다는 것이다. 반대로 나라가 자부심을 준다면 비록 외국에 있더라도 몸과 재산을 던져 지원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법무법인 한강의 최재천 변호사는 "지금처럼 인적.물적 교류가 많은 상황에서는 국적으로 자국민을 묶어 놓을 필요가 있는가하는 의문이 생긴다"며 "누구든 필요한 인재라면 국적에 관계없이 쓸 수 있도록 국민적 정서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삼성경제연구소 김은환 수석연구원은 "해외 유학 후 현지에 정착하는 사람이 30%에 달한다"며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결국 인재공동화 현상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우리의 특수한 상황이다. 이중국적에 대한 거부감을 살펴보면 가장 큰 요인이 바로 병역이다.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조유현 경제조사처장은 "첨단기술을 바탕으로 군사력을 재편하는 세계적인 추세를 감안하면 오히려 '인해전술'식 병력 충원보다 산업과 연구현장의 인재 확보를 통한 대처가 현명하다"고 지적했다.

국제소송 전문인 이상국 변호사는 "재외 공관이나 무역협회 해외지부 등에서 일정 기간 병역을 대신해 봉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자"고 제안했다. 공익근무제.병역특례제를 해외로 확대하자는 것이다.

그는 "정부로서는 예산도 절감할 수 있고 해외업무의 실효성도 높일 수 있다. 그들도 한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함으로써 '대한민국 국민'이란 자긍심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재외 국민이 처한 현실도 존중하면서 우리의 실리를 찾자는 것이다.

앨릭스 한 미주한국상공인단체총연합회 수석부회장은 "병역을 기피하기 위해 한국 국적을 이탈한 경력이 있는 사람은 ▶일정 기간 입국을 금지하고 ▶국적 회복을 시켜주지 않는 한편 ▶경제활동을 규제하는 등의 보완장치만 마련하면 된다"고 말했다.

물론 현재의 논란은 이중국적을 허용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이중국적이 된 사람들, 또 그들의 합법적 선택권에 대해 본인이나 부모에게 멍에를 씌우는 것이 합당하느냐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는 국적 문제를 아예 전향적으로 풀자는 의견도 제시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세계는 이미 자유로운 자본의 이동과 고용시장의 개방에 따른 인력의 순환을 지향하는 흐름을 타고 있다. 우수한 인재의 축적과 활용이 국경없는 경쟁에서 생존하는 열쇠다.

김채영 재외동포재단 경제과장은 "자본이나 인력의 유출은 막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들을 유치할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재고가 없는 기업이 휘청거리듯 우수한 인재망(網)이 구축되지 않은 국가는 국제사회의 변동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이중국적을 무조건 매도할 것이 아니라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사회적 기준을 만들어 인재를 유치하고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국민정서냐, 실리냐. 이제 이중국적 문제를 다시 보고 현명한 선택을 해야할 때다.

특별취재팀=김기찬.장정훈.구희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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