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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한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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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살고 있다는 것과 죽는다는 일은 인류가 지구 위에 그 모습을 나타내면서부터 사색되어 왔다. 원시인이나 미개인들에게는 신비가 미신과 연결됐을 것이고 주술적 요소와 결합되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현대에 있어서도<죽음의 한계>를 두고 이론이 많다.
생명이란 극도로 조화된 화학반응 계로서 동적 평형을 유지하면서 환경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비상할 이만큼 합목적적인 존재이다. 그것이 일정한 형태를 갖추고 외계와 구분 지어져 있으면서도 개방 계로서의 동적 평형을 잃지 않을 때 생물이라고 하여 비 생물과 구별한다.
그러나 생명의 합목적성은 생기론 적 신 초도 아니오 물리화학적 현존법칙으로만 설명되는 기계론의 범위에서만 생각할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지구사의 일부로서 발전하는 과정에 탄생했고 또 발전해 나가고 있는 현재이다.
대체로 의학적 견지에서는 <심장의 박동>이 정지했을 때를 죽음의 한계로 삼는 듯하다. 심장이식이 가능하고 그로써 얼마동안 살았다고 하면 이미 자신의 심장은 없는 것이고 <죽음이후의 생존>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처럼 부분품의 조립으로 생명체를 본다면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우화적 해석도 가능할지 모르겠기에 <심장의 박동정지>에 기초를 둔다는 것은 엄청난 비약이 있다. 더우이 우리 몸에서 심장만을 떼어낸다 하더라도 그「펌프」작용은 계속되는 것이다. 그런 후에 인공적「펌프」로 혈액을 순부 시켜서 생명을 유지토록 하는 일도 가능하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가 법의학적으로는 소박한 기술적 해결방법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보다 높은 차원에서 본다면 생명체는 세포의 종합적 활동에 의한 존재이다. 생명체의 활동이 정상을 상실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심장세포가 다른 사람에게 이식되어서 살아있는 경우도 있겠지만 우리는 그 세포마저 파괴하여 그 내부구조를 살려서 실험하기도 한다.
단세포생물인 세균이나 원생동물은 똑같은 크기로 분열하여서 두 쪽이 모두 살아 남아 번식하기 때문에 <죽음의 한계>는 모호하다. 그러나 고등생물이라 할지라도 정세포나 난세포만이 살아 남아서 자손을 두어 완전한 죽음은 없다고「바이스만」은 말하고 있다.
이러한 연속성이 지탱되는 한 생명은 영속 될수 있는 것이고 몸이라고 하는 커다란 부분은 자연법칙에 따라서 다시 비 생물계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인간은 정서적 동물이다. 사단 설이나 칠정 설이 의미가 있는 것이고 과학적 인문으로 건강하며 사회적 인간으로 왕성한 생존을 한다 하더라도<살아있다>는 의미는 여러 가지 있을 수 있다.
기 천년 전에 죽은 공자나「아리스토텔레스」는 현재도 훌륭하게 살아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나의 혈구가 배양되고 있다고 해서 나의 생명이 무한히 늘어날 것도 아니오 훌륭한 것도 아닐게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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