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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비경쟁에 길 내준 동북아 경제발전

중앙일보

입력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북아시아는 놀라운 경제발전을 경험했다. 일본이 제일 먼저 제2차 세계대전의 폐허를 딛고 기적적인 경제발전을 이뤘고, 이어서 한국이 식민지 침탈과 국토분단, 전쟁의 아픔을 극복하면서 경제발전과 정치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했다. 중국도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의 참상을 극복하면서 경제대국으로 도약하기 시작했다.

무엇이 한·중·일 세 나라의 번영을 가능케 했을까? 답은 간단하다. 지도자들이 군사대국화의 길 대신 경제대국화의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주변국들과 군비경쟁을 하면서 전쟁을 준비하거나 전 세계를 동서 양 진영으로 나누던 냉전적 사고를 극복하고 경제 제일주의 노선을 택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동시에 소련과의 냉전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자 일본의 재무장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특히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고 이듬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의 군사대국화가 아시아에서 소련과 중공을 상대로 전략적 균형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총리(집권: 1948~54년)는 미국의 이러한 요구를 거부했다. 요시다는 일본의 평화헌법이 재무장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며 국방비를 예산의 1%대 미만으로 묶고 경제발전에 올인하는 동시에 안보는 완전히 미국에 전가했다. ‘요시다 독트린’으로 불리는 전후 일본 외교안보의 이 기본 틀은 일본의 번영을 가능케 했다.

한국은 1960년대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경제발전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역설적인 것은 군인 출신인 박정희 대통령이 군비 확장보다 경제재건에 모든 노력을 경주했다는 점이다. 54년 한국의 국방예산은 국내총생산 (GDP)의 10%를 상회했고, 60년에도 7.4%에 달했다. 그러나 65년에 3.73%로 떨어진 이후 줄곧 3%대를 유지하다가 75년에 가서야 4%에 진입했다. 80년에 5.81%까지 치솟았으나 곧 다시 4%로 하락했고, 95년 이후에는 2%대에 머물고 있다. 대남 도발을 일삼고 적화통일을 공공연하게 부르짖으며 총생산 대비 30%에 달하는 막대한 예산을 군에 투입하는 북한과 대치 중인 한국이 이처럼 국방비를 적게 쓴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중국은 마오쩌둥 시절까지만 하더라도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하면서 핵무기를 개발하고 전 세계 급진 혁명단체에 자금을 제공했다. 그러나 78년 집권한 덩샤오핑은 같은 해 일본과 관계정상화를 하고 바로 1년 뒤 ‘개혁·개방’ 정책을 앞세워 경제발전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92년에는 6·25전쟁 때 총부리를 겨누던 한국과의 국교 정상화도 이룩했다. ‘도광양회(韜光養晦)’라는 삼국지의 유명한 고사성어로 대변되는 덩샤오핑의 실용주의 정책은 그 이후 중국의 눈부신 경제발전의 기초를 놨다.

최근 동북아시아의 외교안보 정세가 불안해지고 있는 이유는 지역의 번영을 가능케 했던 경제제일주의가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G2로 부상하면서 자신감을 얻어서인지 ‘강대국’의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본과의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열도) 분쟁은 물론 남중국해의 영토분쟁, 일방적인 방공식별구역 선포, ‘신흥강대국론’ 등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거침없이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 집권 후 군사대국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요시다 독트린의 핵심인 평화헌법을 개정하고 군사비를 GDP 대비 1% 이상으로 증강하고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천명하고 나섰다.

가장 큰 아이러니는 이러한 경향을 미국이 부추기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의 부상에 놀란 미국은 일본의 재무장을 더욱 강하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는 마침 극우보수파 정치인인 아베가 집권하면서 요시다 독트린을 폐기처분하고 미국의 요구에 부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은 냉전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냉전시기에 구축한 지역 내의 군사동맹을 해체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강화시키면서 중국을 견제하자 본격적인 군비 확충에 나섬은 물론 과거 동맹국이었지만 개혁·개방 정책 이후 관계가 냉랭해졌던 북한을 다시 끌어안기 시작했다.

미국의 패착과 중국의 자만, 일본의 시대착오는 동아시아 번영의 기초를 흔들고 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요시다, 박정희, 덩샤오핑처럼 국수주의와 낡은 이념을 버리고 과감한 개방을 통해 눈부신 경제발전과 지역통합을 일궈낸 지도자들의 거대한 비전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전을 이해하고 이를 위한 미국의 역할이 무엇인지 읽어내고 실천할 수 있는 미국의 지도자가 필요하다.



함재봉 존스홉킨스대에서 정치학 박사를 받고 연세대 정외과 교수를 지냈다. 서던 캘리포니아대 한국학연구소장, 랜드연구소 선임연구원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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