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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제3화 고려신사 59대 궁사 고려징웅씨(1)|제l장 자랑스런 한국인의 후예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고려신사는 동경의 서북쪽 약 50km 되는 곳에 있다. 동경교외선의 분기 역 지대에서 서무선 전차를 타고 1시간쯤 달리면 고려 역에 이른다.
또 동북본선 대궁 역에서 갈라지는 국철 천월선을 타고 약l시간 달리면 팔고 선과 교차되는 곳에 고려 천 역이 있다.

<고려 향 입구에 두 장승>
고려 역·고려 천 역 모두가「고마(고려)」라는 우리나라 고유명사를 그대로 쓰고 있다.
비록 두 곳 다 역사는 초라하지만 고려라는 낱말에 정신이 번쩍 든다.
고려 역 조그마한 역사를 나오면 역 앞 광장 좁은 길목에 서 있는 시뻘건 두개의 장승이 사람을 놀라게 한다.
『천하 여장군』,『지하 여장군.』
천하대장군은 머리에 관 모를 점잖게 쓰고 있으나 지하여장군은 두건 하나로 머리를 얌전히 가렸다. 이 일대가 바로 고려 곽이라는 표지이다. 지하여장군의 장승 앞에 조그마한 설명 팻말이 서 있다.
관광객들이 열심히 보고 또 종이를 꺼내 무엇인가 열심히 적 는 사람도 있다.
장승 앞의 설명문은 이렇다.
『장군 표는 조선특유의 액 떼기 도 신이다. 조선을 여행하면 길가 여기저기에 두 눈 또는 세 눈의 무서운 형상을 하고 노려보는 이 장군 표가 세워져 있다.…이 장군 표 장식물은 고려신사 사무소에서도 반포한다.』

<소담한 건축 고려신사>
장승 옆에는 고려 향 일대의 관광안내 도도 큼직하게 세워져 있다.
이제 고려 향은 공해에 시달린 동경시민에게 자연을 맛보게 하는 유원지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주말이면 전차를 타고 소풍 객들이 적지 않게 찾아온다.
관광안내 도에는 청계부락-자연보도-고려상-궁택호-중야부락-대산부락 등 자연을 맛볼 수 있는 산책도로표지를 강조해 놓았다.
그러나 곳곳에서 고려라는 낱말을 볼 수 있는 이곳도 지금은 기옥현 입간군 일고 정으로 행정구역명칭이 바뀌었다.
고려신사는 고려 역에서 서북 2·5km. 고려 천 역에서 동쪽 약 1·5km되는 그리 높지 않은 대궁산 동쪽 기슭 숲 속에 자리잡고 있다.
앞에는 정구 상에서 발원하는 고려천의 청류가 우곡사행 하여 속을 향해 흐르고, 뒤로는 질부연봉의 산으로 둘러싸인 숲이 삼나무와 적송으로 울창하다.
그러나 입구의「도리이」를 비롯해, 배전·목전 등 고려신사의 건축물 자체가 작고 아담하여 이 일대 촌민들이 받들어 모시고 있는 씨 사임을 한눈에 엿보게 해준다. 입구 앞에 세 명문이 꽂혀 있다.
『고려신사의 유래와 문화재(소화 35년 5월) 당사는 지금으로부터 1천2백여 년 전인 나량시대 때 고(구)려 국으로부터 귀화한 야광을 모신 사이다.
한때 만주에까지 세력을 크게 떨친 고려(고구려)가 멸망했을 때, 많은 왕족과 유신이 난을 피해 아국에 망명 귀화했다. 야광왕도 그 중의 한사람이다.
일본의 역사책<속 일본 기>원정천황 영구2년(716년)5월 조에는 준하국(현 정강현)·갑비국(현 산리현)·상모국(현 곤나천현)·상총국 및 하총국(현 천엽현)·상륙국(현 자성현)·하야국(현 절목현)등 7가 고을의 고려인 1천7백99명을 무장국에 옮겨, 고려군을 설치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 군을 통치한 분이 바로 현 고려신사의 제신 야광 왕이다.
야광은 고려의 왕족이었으므로 일본조정이 특히 우대한 것이라고 사료된다.
야광은 민생을 보살피기 위해 누에치기를 장려하고 모국에서 가져온 기술을 가르쳐 산업을 일으키는 등 훌륭한 치적을 남기고 생애를 마쳤다. 주민들은 그의 유덕을 흠모하여 영묘를 세워 고려명신이라고 숭상했었다. 현재의 궁사 고려 씨는 그 후손으로서 그 계보가 사전으로 계승되고 있다….』

<뜰 안 나무에 종이꽃들>
삼나무 숲 속으로 깨끗이 닦아진 길을 조금 걸어 들어가면 오른쪽에 넓은 공터가 있고 그 옆에 사무소가 있다. 다른 신사와 마찬가지로「초수」(일종의 시주)신청을 받으며 신사의 유래 등 이 인쇄된 작은 책자와 그림엽서, 그리고 재수보기「오미구지」등을 맡고 있다.
10「엔」씩 내고 뽑기 식으로 이것을 사보고는 뜰에 있는 대나무 가지에다 매어 달아 놓는다. 못다 이룬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서이다. 이「오미구지」로 신사 뜰 대나무(죽)에는 하얀 종이꽃이 활짝 피었다.
궁사의 면회를 요청하자, 하얀 궁사 복을 입은「고마·스미오」씨가 나왔다.「다다미」16조 가량의 넓은 방에 좌경한 고려 씨는 기꺼이 사전의 고려 씨 계도를 갖다 펼쳐 놓는다. 낡은 두루 마리에 깨알같이 작은 붓글씨로 쏜 한문체 족보이다. 원본은 보험이 붙은 깊숙한 금고 속에 보관돼 있어 복사 본이라고 일러준다. 첫 부분은 벌레가 먹어 알아볼 수 없다고 한다. 지금 있는 고려 씨 계도는 이렇게 시작된다.

<야광 왕이 세상을 떠나자 고려에서부터 건너온 높고 낮은 지위의 모든 사람들은 함께 모여 시체를 성밖에 묻고 일본의 풍습대로 그의 영묘를 그가 생전에 살던 집 뒷산에 세워 그를 고려명신으로 받들었다. 이후 주민들은 이 고을에 흉 사가 있을 때마다 이곳에 와서 빌었더라. 장자 가중이 대를 잇도다….>그리고는 현 59대 궁사 고려징웅씨의 대에 이르기까지 대대의 사연이 간단히 적혀 있다. 야광이 이곳 광막한「무사시노」일각에 자리잡은 것이 716년이라면, 지금까지 1천2백50여 년 동안 가계가 면면히 이어져 온 것이다.
『한국의 삼국시대에 일본에 건너온 소 화인 중 이렇게 뚜렷한 가계 도를 보존하고 있는 것은 저희 가문밖에 없을 것입니다.』
고려징웅씨는 자랑스럽게 단언했다. 지난 8월초 두 번째 한국에 다녀간 일도 있는 고려징웅씨는 현재 45세. 58대 궁사였던 선대 고려명진씨도 생존하나 연로하여 궁사 직을 적자인 징웅씨에게 물려주고 은거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고려」라는 성은 야광 왕 다음인 2대 가중 때부터 쓰고 있는데 고려징웅씨는「사성」이라고 설명했다. 씨족들이 번창함에 따라 직계들만이「고려」라는 성을 쓰고, 방계는 모두 고려와 관련된 고마이,「이노우에」,「고마」라는 분파 성을 만들어 썼다.

<매년 10월 19일엔 대제>
1m60cm가량의 작은 키에 깡마른 인상을 풍기는 고려징웅씨는 차근차근 이곳에 뿌리박은 귀화인의 긍지를 늘어놓았다.『이 고려 향 일대는 우리 조상의 손으로 개척되고 개발된 고장입니다. 때문에 바다를 건너온 귀화인이지만 우리가 이곳의 주인이라는 자부심을 항상 지니고 있어 조금도 소외되거나 구차스런 생각을 가진 적이 없습니다. 1천2백여 년 동안 이 땅에 뿌리를 박기 위해 우리 조상들은 많은 피와 땀을 흘린 것도 사실입니다.
고려신사가 귀화인의 얼을 모신 신사라고 하더라도 고려사람인 이곳 주민들조차 오늘의 생활을 고맙게 생각하고 길흉이 있을 때면 자자손손이 이곳을 찾아오고 있습니다. 1년에 한번 10윌 19일이면 대제가 열리는데 이날은 온통 마을사람들이 전부 삼배를 합니다. 문헌을 보면 현재 일본의 심장부인 이곳 관동평야 각처에는「시라히게」신사 혹은 백두명신이라고 불리는 사가 55사나 있었는데 그 모두가 이 고려신사의 분사로 이곳을 고려총사라 부른 적도 있습니다.
야광 왕 어른이 만년에 흰 수염을 늘어뜨려「백발어른」이라고 애칭 되었기 때문에 백두명신이라는 별칭의 신사이름이 생겨난 것입니다.
또한 야광 왕 어른이 돌아가신 후 고려인자손들이 곳곳에서 고려 군을 본받아 그 지역을 개발하면서 왕의 유덕을 경 모 하여 그의 영을 제사지낸 것이지요.』
땅거미가 내러 깔리기 시작한 신사 뜰에 그의 목소리는 유난히 낭랑했다. <계속>

<글·사진=양태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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