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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별 균형 이룬 중공 새정치국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중국 공산당 십전대회는 서방기자들의 보도 과정에서 몇 가지 혼선을 일으켰다.
원래 중공은 45년 칠전대회 이래 대회 개최 벽두에 「대회주석단」(이번 경우에는 대회의장단으로 개칭)이라는 것을 뽑는다. 구전대회 때에는 그 숫자가 1백76명이었고 이번 경우에는 1백48명이었다.
그런데 종래에는 단순히 「주석단」만 뽑던 것을 이번에는 그 가운데서 다시 의장 1명과 부의장 5명을 뽑고 거기에다 의장단 비서장을 덧붙였었다.
이와 같은 대회방식은 중국공산당 창당이래 처음이었으므로 서방 기자들은 의장단을 당 주석단으로, 의장단 비서장을 당 총서기로 번역하여 당 중앙위에 서기국이 되살아난 듯이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십전대회 직후에 열린 십전 1기 중앙위총회의 결과는 이번 대회가 혁명원로와 신세대의 자리바꿈 포석이라는 점을 더욱 명백히 해줬다.
우선 당중앙위 및 여기에서 선출된 정치국의 주석단을 보면 대회의장단이 그대로 선출되기는 했지만 그 나열 순서가 그대로 서열의 변화를 뜻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무엇보다도 「제3인자 설」의 주인공인 왕홍문에 대해 십전대회 직전까지도 인민일보 등 공식보도기관에서 그만한 대접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그가 장·요의 막하로서 소위 「상해세」의 일원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서 설명해야 할 것이다.
참고 삼아 중공의 요인들이 거의 총출동했던 지난 4월13일의 「시아누크」 환영식에 관한 인민일보를 보면 왕의 서열은 주은래·강청·섭검영·장춘교·요문원·이선념·홍등규·이덕생·왕동흥 다음의 10째였다. 만약 주덕·유백승·강생 등의 불참자를 보태면 13번째가 되는 것이다.
30일에 발표된 정치국의 판도 역시 장·요를 주축으로 한 문혁조의 조락과는 거리가 멀다.
연령 비율로 보나 문혁출세파와 원로의 비율로 보나 왕을 앞세운 장·요파가 조락했다는 징후는 없는 것이다.
먼저 연령별로 보면 70대 이상의 정강산조가 7명, 60대의 연안조가 10명, 50대 이하의 문혁조가 7명. 불명(오계현·여)이 1명으로 모·주가 말하는 노·장·청년의 3결합이 달성된 셈이며 젊은 문혁조의 진출은 구전대회 당시에 비해서 조금도 수그러지지 않았다.
또 흔히 말하는 주은래파와 강청파의 분류 방식에 따라도 장·요가 이끄는 신세대는 결코 쇠락한 것 같지 않다. 공장지사인 예지복, 「위구르」족으로 소수 민족대표의 상징인 새복정, 방직 여공 출신으로 여성대표의 상징인 오계현을 제외한 23명중 주은래파의 핵심인 정부요인은 이선념과 오덕의 2명밖에 없다.
물론 섭검영·주덕 등 혁명원로의 일부와 허세우·진석련 등 군부 지도자가 주파로 꼽힐 것이나 강·장·요·왕·왕·이덕생의 6명 외에 이른바 대상인민공사의 영웅이며 모의 직계인 진영귀까지 진출시킨 문혁파의 기세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드높은 것이다.
또 당중앙위를 봐도 문혁 때 탈권되었던 사람 중 등소평을 비롯한 5명의 구간부가 복귀했으나 1백95명 가운데 새로 중앙위원이 된 숫자가 47명(구전대회에서 후보위원이었던 사람은 제외)에 이르며 이들이 거의 다 문혁 때 출세한 혁명적 대중이라는 사실에 비겨보면 이것은 미미하다고 판단된다. 문혁파들이 전체적으로 기반을 더욱 단단히 했으면서도 그 핵심인 장·요가 그들의 직계인 왕만 진출시킨 채 6명의 정치국 주석단에서 빠진 이유는 아직 아리송하다.
하지만 이것은 요문원이 곧 열릴 제4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 대비해서 「숨겨진 보물」로 취급받거나 혹은 이번에 개정된 당규약이 칠전대회 당시의 중앙위 상무위 비서장 제도 비슷한 것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짐작된다.
어쨌든 현재까지의 결과를 가지고 장·요 내지 문혁파들의 쇠퇴 전조라고 보는 것은 속단인 것 같다. <홍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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