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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컨설팅그룹이 들려주는 ‘경영의 한 수’] 새 시장 없다면 … 쪼개고 또 쪼개라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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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6호 23면

단발머리에 비즈니스 캐주얼 차림. 단정하고 똑 부러져 보이는 여성이 화면 한복판 의자에 앉아 있다. 한눈에 봐도 커리어 우먼이다. 그런데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다. 내레이션이 깔린다.

⑫ 일본 보험업을 통해 본 ‘성숙기 진입 시장에서의 생존 전략’

‘진단을 받았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 내가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몇 년 전 일본에서 크게 화제가 됐던 일본 악사 생명보험의 TV광고다. 악사는 경제활동을 하는 30~40대 여성을 집중 조사했고, 이들에게 꼭 맞는 상품이 무엇일지 장기간 연구했다. 그 결과 미혼 여성이 가장 불안해하는 질병은 암이며, 이로 인한 휴직 및 수입 감소 등을 가장 위협적으로 느낀다는 결론에 이른다. 경제적으로 자립했지만 자기 자신 외에는 달리 기댈 곳이 없는 30~40대 싱글 여성의 불안 심리를 정확히 짚었다. 여기서 탄생한 상품이 ‘소득 보장 암보험’이다. 직장생활을 하는 여성이 많아지고 결혼은 점점 늦어지는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과 이에 따른 위험 보장 수요에 맞춘 상품을 개발한 것이다. 이 상품은 나오자마자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사람이 늙어가는 것이 자연의 섭리인 것처럼 산업이나 상품에도 ‘라이프 사이클’이 있다. 따라서 산업이나 상품이 성숙기에 진입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해당 시장이나 산업군에 속해 있는 기업과 그 구성원에게 이 자연스러운 노화는 참으로 괴롭다. 상품이 표준화되면서 차별화가 어려워지고 경쟁이 격화돼 마진도 줄기 때문이다. 제품 품질은 이미 진화의 임계점에 달하고, 혁신 속도는 둔화된다.

제품 수요와 생산 증가세가 둔화되거나 정체되는 것도 성숙기에 진입한 산업의 특징이다. 신규 기업의 진입은 쉽지 않고 기존 경쟁자 중에서는 낙오자가 나온다. 기업 간 인수합병(M&A)도 본격화된다. 제품 가격은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고, 가격 변동성은 적다. 무엇보다 기업 수익성이 낮아진다. 생산 공정이 이미 최적화에 가까워 더 이상 원가를 절감하기가 쉽지 않다. 산업 전체적으로 생산설비는 과잉 상태다. 세계적으로 여러 산업이 이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 금융업이 대표적이며, 특히 그중에서도 ‘잃어버린 20년’ 기간 동안 일본 보험업에서 이 같은 성숙기 진입 산업의 전형적인 특징을 목격할 수 있다.

90년대 후반 줄도산 사태 맞은 日 보험업계
1990년부터 2011년 사이 일본의 연평균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0.2%에 그쳤다. 2000년 닷컴 버블 시기에도 일본의 장단기 금리는 0.01~1.3%를 오갔다. 이른바 ‘제로 금리-디플레이션(물가가 하락하고 경제활동이 침체)’의 덫에 빠진 것이다. 거시경제 환경이 이러한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보험시장은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일본 생명보험의 가입률은 이미 94년 95%로 정점을 찍었다. 이후 지속적으로 하락해 2000년에는 87.5%, 2012년에는 85.8%까지 떨어졌다.

산업 안팎의 날씨가 이렇게 나빠지자 일본 보험업계는 ‘줄도산’ 사태를 맞는다. 97년부터 2001년까지 닛산생명, 도쿄생명 등 일본의 내로라하는 7개 보험사가 줄줄이 쓰러졌다. 70~80년대 고금리를 약속하고 팔았던 보장·연금 상품의 만기가 돌아오는데 10년 가까이 계속된 저금리로 운용수익이 나지 않는 바람에 역마진마저 발생했다. 계약자에게 돈을 내주지 못할 처지가 되는 보험사가 속출했다. 결국 약속된 보험금과 환급금을 받지 못하는 보험 계약자가 속출하면서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됐다. 재정적자 늪에 빠져 있던 일본 정부는 보험 계약자에게 일부 보험금을 대신 지급하고 해당 보험사를 파산시켰다.

산업 전체가 위기에 몰렸지만, 그렇다고 일본의 생명보험업이 소멸한 것은 아니다. 시장이 재편됐다. 살아남은 보험사 중에는 시장 점유율을 늘리며 위기를 기회로 활용한 곳도 생겼다. 스미토모, 프루덴셜, 악사, 아플락, 도쿄마린안신생명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2001년에서 2009년까지 8년 사이 시장점유율을 0.7%포인트에서 1.4%포인트까지 확대했다. 보험 가입률이 떨어지는 성숙 시장에서 이 정도의 점유율 상승은 대단한 성취다.

이들은 경제와 산업이 변곡점에 다다랐을 때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적응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일본 보험시장 재편 과정 사례를 통해 성숙기에 진입한 시장과 산업에서의 혁신 전략에 대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인 실행 전략 몇 가지를 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고객과 시장을 세분화(segmentation)한다. 앞서 30~40대 여성을 타깃으로 하는 소득보장 암보험을 히트시킨 일본 악사가 이에 해당한다. 또 최근 일본 닛세이는 상품 모듈화를 통해 적은 비용으로 고객마다 맞춤형 상품을 제공하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다. 얼핏 대단한 혁신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 보험사가 죄다 엇비슷한 복합상품을 팔고 있는 것과 견주어 보면 차이가 크다. 제품의 모듈화는 적은 비용으로도 고객에게 맞춤형 솔루션을 제공할 수 있는 수단이다. 막대한 추가 투자 없이 고객사에 솔루션을 제공하려면 제품을 표준화된 작은 모듈로 만들 필요가 있다. 마치 레고처럼 표준화된 블록으로 유연하게 모든 장난감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은 개념이다.

둘째로 세분화된 시장과 고객을 정교하게 관리할 수 있는 멀티 채널을 꾸준히 고민한다. 이는 일본에서도 현재진행형인 실험이기도 하다. 수없이 실패하면서도 생명보험 상품의 인터넷 판매에 끊임없는 도전이 이뤄지고 있다. 또 보험설계사가 고객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플라자’라는 형태로 고객이 찾아오게 하는 방문형 점포, 텔레마케팅 채널 활용, 대면 채널과 비대면 채널의 연계 전략 등 다양한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이것이 필요한 이유는 세분화한 고객과 시장을 특정한 형태의 한 채널이 다 커버하는 것은 효과나 효율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로 리스크 관리다. 특히 보험의 경우 호흡이 긴 산업이어서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리스크에 노출되기 쉽다. 과거 고금리 시기에 팔아놓은 확정금리형 상품 때문에 금리 하락기에 일본 보험사들이 줄줄이 문 닫은 것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장·단기 리스크를 끊임없이 점검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도전과 혁신 … 포화시장서 기업 회춘 명약
안타깝게도 지금 한국의 보험산업이 처한 상황이 과거 일본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 보험시장은 2000년대 중반까지는 연평균 9%대의 급성장을 했다. 외국계 보험사의 공격영업, 연금 및 저축보험에 대한 세제 혜택 덕이었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 이후로는 성장률이 꺾였다.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서 생계보장형 보험에 대한 수요는 줄어 일본과 비슷하게 한국의 가구별 보험 가입률은 2008년 연 91%로 정점을 찍은 후 감소세로 돌아서 2012년 기준 86%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저금리 기조가 장기간 지속되면서 보험사의 수익성도 악화되고 있다. 국내 생명보험사의 확정금리형 상품 비중은 절반이 넘는다. 이에 따라 국내 생명보험업계 평균 영업이익률은 2010년 5%대에서 2012년 3% 밑으로 떨어졌다.

요컨대 성장은 정체되고 저금리로 수익성은 악화되며 경쟁은 치열해지는 전형적인 성숙기 시장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일본의 사례를 통해 한국 생명보험사도 이 같은 변곡점에서 ‘시장을 얻는 기업’이 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다. 시장이 성숙기에 접어들었어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혁신을 멈추지 않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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