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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의 「유머」|민희식<이대 교수·불문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우리는 길을 지나가면서 흔히 사람들이 싸우고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가만히 서서 서로 욕설을 퍼붓는 말을 들어보면 싸울만한 일이 되지 않는 수가 더 많다. 그들은 비굴해지지 않고서 감정의 표현에 「베일」을 씌울 줄 모를 뿐이며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고있는 지도 모르는 수가 더 많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때로는 몹시 흥분하여 치고 받고 하는 수가 있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이 「유머」가 없고 너무 메마른데서 오는 것 같다.
우리가 아주 어렸을 때 할아버지는 공자의 말씀이라 해서 『논어』를 매우 엄숙하게 우리에게 가르쳤다. 흔히 유교적인 전통이 우리에게서 「유머」의 감각을 말살시켰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사실 선입관을 버리고 『논어』를 읽어보면 그것은 조금도 고리 탑탑한 교훈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쉽사리 알 수가 있다. 물론 『논어』에는 교훈도 있고 회의도 있고 고대의 합리주의도 있지만 「유머」도 매우 풍부하다. 공자는 때로는 군자에게 실언을 하고 나서 <지금 말한 것은 농담일세>하고 태연스럽게 말하기도 하고 몹시 궁지에 몰렸을 때 <군자는 원래가 궁하니라>하고 웃기도 하였고 한 제후가 호색의 부인과 마차를 타고 가는 것을 보고<나는 일찍이 여자를 사랑하는 장도론 열렬하게 도덕을 사람을 본적이 없다>고 빈정대가도 하였다.
「유머」는 문화의 하나의 형식이다. 우리 나라 정치가의 연설가운데 고상한 「유머」만 있었더라도 남을 헐뜯고 저주하지 않고서 일을 잘 처리해 나갔을 것이다.
교회에 가보아도 설교를 하는 목사나 그것을 듣는 신자나 지나치게 심각한 모습을 하고있다.
나는 그것을 비난하지는 않지만 다만 성경에도 「유머」가 많다고 생각한다. 「노아」가 나체로 자는 이야기라든가 『욥기』에 나오는 「욥」의 역설적인 말은 대단한 「유머」이다.
내가 「프랑스」에 있을 때 여름에 「알프스」산에 등산을 갔다가 도중에 폭풍우를 만나 중턱에서 오두막에 피신하여 추위에 떨며 촛불을 켜놓고 밤을 지낸 일이 있다.
그 오두막에는 어느 등산객이 불을 피우느라고 그랬는지 모르지만 반쯤 떨어져나간 책이 한 권 버려져 있었다. 나는 아무 책도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 책을 읽게 되었는데 그러다가 흥에 끌려 어찌나 재미있었는지 밤을 새우며 읽어버렸는데 없어져버린 다음 「페이지」가 읽고싶어서 못 견디게 되었다. 며칠 후 나는 「파리」에 돌아오자 그 찢어진 책을 가지고가 그것과 똑같은 책을 구해보니 놀랍게도 이 「유머」소설이 다름 아닌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라는 소설이었다.
나는 이 책을 「프랑스」에 가기 전에 일어로 번역된 것을 읽은 적이 있기 때문에 몹시 놀랐다.
불어로 번역된 책이 더 재미있을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아마 나는 학생시절에 「도스도예프스키」하면 『죄와 벌』이나 『「카라마조프」의 형제』와 같은 작품을 연상하고 심각하게 읽은 것 같다.
이처럼 심각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편견이 나로 하여금 이 「유머」와 소설의 진가를 알 수 있는 「유머」감각을 상실케 한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이러한 고정관념이나 편견을 버리고 약간의 재치와 「유머」 정신을 갖는다면 우리의 생활은 훨씬 더 밝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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