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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4년, 1894년 … 다시 갑오년, 한반도는 안녕한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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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한명기 교수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을 찾았다. 성곽에는 눈이 덮여 있었다. 한 교수는 “이곳이 병자호란의 현장이다. 강대국끼리의 패권 다툼에 준비 없이 휘말려 들어가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던 처절한 역사의 현장”이라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갑오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대지를 박차고 내달리는 준마처럼 2014년 새해가 활력과 희망으로 가득차기를 바라는 기원들이 넘칩니다. 2013년 계사년 한반도의 남과 북, 그리고 동아시아 안팎의 정세가 하 수상했던 터라 새로운 해의 무사안녕을 바라는 염원은 더욱 절절한 듯합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한반도의 역대 갑오년은 별로 안녕하지 못했습니다. 우선 1894년 갑오년이 그러했습니다. 그해 3월,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들이 죽창을 들고 일어났지요. 고부군수 조병갑의 가렴주구를 계기로 봉기한 것입니다만, 농민들의 외침 속에는 근본적인 염원이 담겨 있었습니다. ‘토지를 평균 분작하고 신분제를 폐지하라’는 개혁 요구에서 드러나듯이 그들은 더 이상 낡은 체제의 모순과 억압을 견뎌낼 수 없다고 외쳤습니다.

 민초들의 비명은 이미 19세기 초부터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옵니다. 개혁을 표방했던 정조 정권이 끝난 뒤 반동적인 세도정권이 등장했던 탓이 컸습니다.

 국왕의 존재감은 미미해지고 몇몇 외척 가문들이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그들을 비판하고 견제해야 할 언관들마저 힘을 잃게 되면서 권력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국정을 농단합니다. 적절히 통제되지 않은 권력은 흉기나 다름없는 법이지요. 청탁과 뇌물에 의해 인사가 이루어지고, 지방에 파견된 수령들은 ‘본전을 뽑기 위해’ 민초들에게 수탈을 자행합니다.

100여 년 전 조선은 동아시아 각축장

 고난에 처했지만 의지할 곳이 없던 민초들은 스스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먹고살기 힘든 현실과 수령의 학정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체제 모순을 뜯어고치라는 요구를 담은 익명서들을 곳곳에 붙였습니다. 상급 관청으로 달려가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무리를 규합하여 봉기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세도정권은 그들의 호소와 절규를 외면했습니다. 대신 가혹한 탄압을 일삼았을 뿐이지요.

 조선이 이렇게 내부 모순 때문에 휘청거리고 있을 때 서양 세력이 동아시아로 거침없이 몰려옵니다. 1840년 아편전쟁에서 영국이 청을 굴복시킨 것은 그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동아시아의 패권국 청이 영국에 의해 한 방에 나가떨어지는 장면을 목도하면서 청 못지않게 큰 충격을 받은 나라가 있었습니다. 바로 일본입니다. 아편전쟁 이후 일본은 서양을 경계하면서도 그들의 장기를 배우느라 여념이 없었지요. 그 바탕에는 ‘군사 기술을 비롯한 서양의 장기를 잘 습득하면 우리도 언젠가는 청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야릇한 야망이 놓여 있었습니다.

 일본은 이렇게 습득했던 장기를 조선을 침략하는데 먼저 활용합니다. 메이지유신 직후 정한론(征韓論)을 내세우더니 1876년에는 조선을 겁박하여 강제로 개항시킵니다. 내부 개혁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나라의 빗장까지 풀리면서 모순은 증폭됩니다. 개항 이후 일본인들의 고리대가 농촌으로 침투하고, 다량의 미곡이 일본으로 유출되면서 민초들의 고난은 더 심각해지지요.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났던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습니다.

 정권은 농민전쟁을 진압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 청군과 일본군이 들어오고 한반도는 양국 군대가 맞붙는 전장으로 전락합니다. 그리고 청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은 동아시아의 패권국이 됩니다. 이후 조선의 농민군은 공주의 우금치를 비롯한 삼남의 곳곳에서 일본군에게 도륙당하는 참담한 지경으로 내몰리게 되지요. 우리 스스로 내부를 추스르지 못한 상태에서, 집요하게 밀려왔던 외세에게 속절없이 무너졌던 것입니다.

 임진왜란이 진행 중이던 1594년 갑오년의 기억 또한 서글프기는 마찬가지입니다. 1592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을 정복하겠다며 조선을 침략합니다. 오랜 전국시대를 통해 쌓은 풍부한 전투 경험에 신무기 조총까지 갖췄던 일본군은 순식간에 평안도와 함경도까지 밀고 올라오지요. 이순신의 영웅적인 활약과 의병들의 자발적인 희생이 없었더라면 조선은 필시 초전에 망했을 것입니다.

 명은 요동을 비롯한 자국 땅을 보호하기 위해 조선에 참전합니다. 1593년 1월,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은 평양에서는 일본군을 완파했지만 벽제에서는 참패합니다. 어쨌든 일본군을 한반도의 중앙 부분까지 밀어냈던 셈이지요. 벽제 패전 이후 명은 태도를 바꿉니다. 일본군과의 결전을 포기하고 협상을 통해 전쟁을 끝내겠다고 선언합니다. 자국 땅을 전쟁터로 만들지 않으려는 참전 목표가 달성된 이상 굳이 조선을 위해 일본군과 사생결단을 벌일 이유가 없었던 것이지요.

1594년, 명군·왜군 양쪽에 고통 당해

 조선을 배제한 채 벌어진 밀실의 강화 협상은 장장 4년이나 이어집니다. 이 기간 동안 일본군은 철수하지 않고 남해안 일대에 성을 쌓고 주둔하면서 조선인 납치, 문화재 약탈 등 갖은 악행을 자행합니다.

 1594년은 강화 협상의 폐해가 본격화되는 시기였습니다. 명군 지휘부는 조선군이 일본군을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도록 금지합니다. 일본을 달래기 위해 조선의 민족 감정을 철저히 무시했던 것이지요.

 일본군을 공격하려 했던 조선군 지휘관들은 명군에게 끌려가 곤장을 맞기도 했습니다. 또 싸울 의지가 없었던 명군 장졸들은 조선 백성들에게 심각한 민폐를 끼칩니다. 급기야 “명군은 참빗, 일본군은 얼레빗”이라는 속담이 생겨날 정도였지요. ‘구원군’이라고 굳게 믿었던 명군의 민폐가 더 야속하고 뼈아프게 느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갑오년 무렵부터 조선 관민들은 일본군에게 얻어맞고 명군에게 걷어차이면서 최악의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저는 지금 남한산성에 와 있습니다. 청군에게 포위된 채, 춥고 배고팠던 병자호란의 처절한 현장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결코 별개의 사건이 아닙니다. 그리고 청·일전쟁 또한 두 전쟁과 몹시 닮아 있습니다. 16세기 후반 떠오르던 일본이 쇠퇴하던 명에게 도전하면서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임진왜란을 계기로 굴기했던 만주가 명에게 도전하면서 병자호란이 발생합니다. 또 19세기 후반 다시 굴기하던 일본이 청에게 도전하면서 청·일전쟁이 터집니다. 주변의 강대국들 사이에서 힘의 전이가 발생하면 한반도는 어김없이 전쟁터가 되는 비극에 휘말렸던 셈이지요.

 지금 한반도 주변에서는 중국의 공세가 무시무시합니다. 오죽하면 패권국 미국이 ‘동아시아로의 귀환’을 선언했겠습니까.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에서 불붙은 중·일 갈등, 미·중 대결의 화염은 ‘방공식별 구역 문제’를 타고 이어도를 거쳐 서해를 향해 북상하고 있습니다. 아베는 보란듯이 야스쿠니를 참배했습니다. 모두 중국의 굴기와 맞물린 격동입니다. 최근에 나온 일본의 한 잡지는 2014년을 아예 “중화제국주의의 야망을 분쇄하기 위해 국방을 재건하는 원년”이라고 표현했더군요.

 한반도 주변 격랑의 파고가 더욱 높아질 것이 분명해 보이는 2014년, 대한민국은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요? 우리의 역량이 과거보다 훨씬 커진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주변 열강에 비하면 ‘약소국’이고 ‘끼인 자’라는 사실 또한 여전합니다.

남한산성에서 생각하는 ‘약소국’ 설움

 ‘끼여 있는 약소국’은 외교와 내정에서 지극히 전략적이어야 살아남습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민심을 어루만지고 사회를 통합해야 합니다. 갈라지고 찢겨진 내정에서 제대로 된 외교가 나올 수 없습니다. 1894년 갑오년의 비극에서 절감하는 엄중한 교훈입니다.

 새로운 갑오년이 다시 시작된 오늘, 쓰라렸던 역사를 직시하면서 안팎의 난관을 헤쳐갈 수 있는 지혜와 교훈을 얻을 수 있기를 간구합니다.

◆한명기=1962년생. 서울대 국사학과 졸업, 동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명지대 사학과 교수다. 최근 출간한 역사 평설(評說) 『병자호란 1·2』는 중앙일보·교보문고가 공동선정한 ‘2013 올해의 좋은 책 10’에 들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무렵을 중심으로 당시 동아시아 국제 정세를 통해 오늘을 짚어보는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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