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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7)미결의 종장(2)|제네바 정치회의(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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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53년 10월 26일부터 판문점에서 열린 정치예비 회담은 43일만인 12월 l2일에, 그리고 54년 4월 26일부터 제네바에서 막을 연 정치본회의는 50일만인 6월 15일에 각각 막을 내려 한국문제는 미궁에 들어간 채 해결을 보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원래 정치회담 개최를 관계국에 건의한 휴전협정 제4조는 각자가 특히 공산 측이 아전인수격으로 자기편에 유리하도록 해석, 수용한 만큼 처음부터 어떤 태도를 기대도 하지 않았고 또 할 수도 없었다.
판문점 정치예비 회담은 벌써 개최 첫날에 결렬을 직감했다고 당시의 최병우 조선일보 기자는 현지에서 이렇게 진단했다(주=최 기자는 1958년 9윌 26일 한국일보 특파원으로 대만해협의 금문도 종군취재 중 순직).
『한국정부대표도 업저버로 참석한 가운데 26일 판문점에서 막을 연 정치예비 회담은 얘기한 바와 같이 개회 벽두부터 쌍방의 주장이 대립되어 정치 본회의 개최는커녕 그것을 마련하기 위한 예비회담의 타결조차도 의심케 되었다. 이래서 이 정치 회의도 2년 넘어 끈 휴전회담 못지 않게 아마 파란곡절이 예상되고 있다. 회담 첫날에 유엔 측은 정치 본 회담 개최의 시일·장소 등을 협의하자고 제안한데 대해 공산 측은 구성국 문제의 토의가 이에 앞서야 한다고 말하고 나아가서 러시아 중립국의 참석까지 주장하였다. 이렇게 해서 예비 회담은 실질적 토의에 들어가기 전에 의제결정 문제부터 정면 충돌을 일으켰다.

<중립국에 소련 포함을 억지>
휴전협정 제4조 대로 한다면 지금쯤은 정치회의 자체가 진행 중이어야 할 것인데 이제 겨우 예비회담이 개최됐다는 것은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여실히 증명한 것이라 하겠다.』
공산 측은 정치회의 구성국으로 쌍방 관계국외에 한국문제에 관심을 갖는 인도·버마·파키스탄·실론·인도네시아의 5개 중립국뿐만 아니라 소련까지도 이 범주에 포함해서 참석시키자고 제안하였다.
공산 측은 휴전회담에서 중립국 감독위원회 구성 토의 때에도 소련을 중립국의 일원으로 지명, 고집하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마지못해 철회했는데 정치예비회의에서 다시 이를 제기한 것이다.
6·25남침의 원천인 모스크바를 교전 측 아닌 중립국으로 보강하여 한국문제 토의에 참가시키려는 공산 측의 끈질긴 기도는 결국 관철되어 제네바 본회의에는 몰로토프 외상의 참석을 보긴 했다. 한편 중립국 참가문제에 있어서는 휴전회담보다 한술 더 떠서 주로 아시아 5개 황색 국가만을 지명함으로써 한국 문제는 아시아인끼리 또는 한 걸음 더 나가 한국 문제는 한국인끼리 해결하자는 포석을 다져 놓으려고 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는 외국인 철수를 겨냥한 것이었다. 예비회담에서의 이같은 공산 측 주장의 첫 당장의 목표는 제네바 본회의 때에 들고 나온 중립국감시위에 의한 총선이나 제헌과 총선 준비를 위한 「전조선위」설치의 군사포석이었다. 이렇게 정치회담에 임하는 공산 측의 전략전술은 「일관성」과「연관성」을 교묘히 배합한 것으로 제네바 본회의에서는 압도적인 인력과 재력을 투입하여 총 공세를 폈다.
우리 대표단은 제네바 도처에서 공산 측의 그런 입김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은 우리 대표가 밝히는 회의 막후에서 공산 측이 벌였던 공작의 몇 가지 예.
▲임병준씨(당시 유엔 주재대사·제네바 회의 한국 대표·전 외무장관·79) <북한은 대표단 구성에도 우리편 대표들과 접촉을 미리 계산한게 분명합디다.
예를 들면 여기서 황진기 법무차관이 나가니까 그쪽에서도 법무부상이 나왔고 이수영 국장 상대로는 판문점 휴전회담 때 안면이 있는 이상조가 왔어요.

<낯간지러운 미인계까지 써>
이수영씨에게는 이상조로부터 몇 번 어떤 요정에서 다함께 만나자는 전화가 왔다는 거예요. 다른 외국사람들은 소용없으니 우리끼리 이야기하자는 게지요.
북한의 이런 막후 공작이 물론 우리 대표단에 먹혀 들어갈 리는 만무하지만 다른 서방 측 대표단에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고 보아요. 남일은 전세 낸 고급별장에서 매일처럼 수천 달러를 들인 호화로운 만찬회를 열고 서방 대표단과 수행원·기자들을 초청해서 환심을 사려고 했어요. 특히 그들이 주력한 것은 대표단보다도 그 아래 수행해 온 실무자들과 접촉해서 정보를 얻으려 했어요.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낯간지러운 미인계까지 쓴 것 같습디다. 대표단과 함께 데려온 꽤 많은 미모의 여성들을 어디다 썼겠소.>
▲홍진기씨(당시 법무차관·제네바 회의 한국대표=현 중앙일보 사장·57)<회의는 대개 하오 2시부터 시작해서 4시간쯤 하는데 그 중간에 휴식이 있어 따로 마련된 휴게실에서 칵테일이나 차를 들면서 환담을 나누어요.
그런데 회의장 관리 측에서 좋은 다과나 주류를 마련해 놨는데도 북한측은 옆 테이블에다 따로 인삼주·인삼차·담배 등을 준비해 놨어요.
회의 2일째 휴식 때인데 그 쪽에서 백남운 교육상이 우리가 있는데로 슬슬 다가옵디다. 나는 백을 잘 알아요.
8·15 해방 직후에 서울 대하교 전신인 경성대학 법문학부 구성 문제를 논의할 때 백낙준씨 밑에서 그와 유진오씨 나, 이렇게 넷이 여러 번 회합한 적이 있었거든. 백은 대뜸 『변 선생, 홍 선생 오랜만입니다』라고 수 인사를 하더니 자기가 소개하겠으니 남일 동무한테 인사하러 가자는 거예요.
지금 같아서는 남북대화를 하고 있으니까 그런 일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때는 휴전 후 1년도 못 됐으니까 매우 심각한 문제였어요. 그러나 변 장관은 의젓한 태도로 6·25때 납북된 현상윤 고대 총장과 임정요인이며 변 장관과는 북경대학 동창인 조소앙 의원의 소식을 차례차례 묻습디다. 백은 좀 당황하는 기색으로 모른다는 대답이예요. 그러면서 자꾸 남일 동무한테 인사하러 가자는 거야. 변 장관은 이다음에 가자고 하고 그날은 헤어졌어요. 그날 숙소에 돌아와서 우리 대표단은 회의를 열고 그 문제의 대책을 논의했어요.
아니나 다를까 그 이튿날 휴식시간 때 백이 또 와서 저기 남일 동무가 서 있는데 가서 인사라도 나누자는 거예요. 정말 그 쪽에는 몰로토프·주은래·남일 등 공산 측 대표들이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고 하는게 보입디다. 변 장관은 『인사는 차차 하기로 합시다』라고 대답하고는『이 기회에 자유 세계로 망명하지 않겠소. 우리가 책임지고 신변보장은 할 테니』라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백은 깜짝 놀라며 『에엣!』하더니 그냥 사라져 버리더군. 그후 백 자신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지만 한국문제는 한국사람끼리 이야기하자는 그들의 막후 공작은 끈질기게 계속 됩디다. >

<판문점 예비회담 무기 휴회로>
이번에는 다시 판문점의 정치예비 회담으로 되돌아가 무기휴회로 들어갈 무렵의 사태 발전을 살펴보겠다. 원래 유엔군 측은 예비회담에서는 정치 본회의 개최 장소와 날짜만 결정하면 될 줄 생각했다.
왜냐하면 휴전협정 제4조의 쌍방군사령관이 건의하는 관계국이란 의당 쌍방교전국 즉 유엔 참전 16개국과 한국, 그리고 공산 측의 중공·북한을 말하며 정치 본회의는 이 18개국으로 개최한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앞서도 지적했듯이 공산 측은 아전인수격으로 「관계국」에는 한국문제에 관심을 갖는 중립국, 특히 같은 아시아의 5개국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확대 해석했다. 더욱 기석복은 휴전회담의 중립국 감독위원회 구성 때 제안했다가 철회한 소련을 정치회의에서는 중립국으로 꼭 참석시켜야 한다고 고집하였다. 유엔군 측은 처음에 소련이 중립국이 아닌 공산 측의 일원으로 참석하는 것은 반대치 않겠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좀 후퇴하여 소련에 표결권을 주어 정치회의 결정사항에 구속되도록 하자고 제안했으나 공산 측은 응하지 않았다.
한편 회의 장소로 유엔 측은 제네바를 그리고 공산 측은 중립국인 인도 수도 뉴델리를 각각 제안했는데 특히 한국이 후자 장소를 맹렬히 반대하여 이 문제도 타협을 보지 못하였다. 이렇게 판문점 예비 회담은 참가국 범위와 회담 장소로 의견이 정면으로 맞섰는데 결국 12월 12일에 아더·딘 대표가 퇴장함으로써 무기휴회로 끝장을 보고 말았다.

<황화의 폭언에 딘 대표 퇴장>
이날 회의에서는 본호의 때의 표결방식을 논의하였는데 딘 대표가 쌍방은 각각 한개 단위로서 투표한 뒤 만약 어느 일국이 표결결과에 구속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를 할 때 그 결정은 동 특정국에 대해 구속력을 가질 수 없다고 제의했다. 이는 다분히 한국의 입장을 감안한 발언이었다. 이에 대해 중공의 황화는 이 딘 제의를 과거의 반공포로 석방과 결부시켜 그때 미국이 한국과 공모했다고 몰아붙였다. 그러자 딘 대표는 이 폭언의 철회를 요구하였고 공산 측이 불응하자 퇴장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공산 측은 재빨리 회담결렬의 책임은 미국이 져야 하며 회담은 세계 평화를 위해 계속해야 한다는 선전공세를 전개하였다.
공산 측은 54년 1월 14일에 임박한 중립 지대안의 반공포로 석방을, 견제하려고 판문점 예비회담 재개를 요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정치회의 문제는 열강의 손으로 넘어갔는데 그것이 구체화된 것이 54년 1월 25일부터 2월 18일까지 개최된 미·영·불·소의 베를린 4상 회의였다.
◇주요일지(1953년 7월 11일∼15일)
※11일 ▲휴전회담 본회의 계속 비밀회의 ▲이·로버트 특사의 제 14차 회담 종료 ▲래드퍼드 신임 미 합동참모본부 의장 취임 ▲리지웨이 대장은 나토 사령관에 취임 ▲동베를린의 계엄령 해제
※12일 ▲ 미그 7대 격추 ▲공산군, 서부 전선서 곧 평화 온다고 선전방송 ▲중공의 인민일보, 소련의 베리야 추방 지지 사설
※13일 ▲중공군, 중동부서 대공세 ▲독도 접근의 일본 순시함에 발포 축출
※14일 ▲한국군, 7만 중공군 공격으로 중동부에서 약간후퇴 ▲미 공군, 중동부 전선의 중공군을 종일 맹폭
※15일 ▲중공군의 대공세 3일째 계속 ▲미8군, 중동부 전선 전황보도 관제 ▲로버트슨 특사, 귀국코 이 대통령 친서를 아 대통령에게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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