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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본사 주섭일 파리 특파원 긴급입수 독점 연재|전택보(컷은 런던에서 전 사장이 손수 써서 전송된 것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외국인과 사진 찍기 피해>
「레닌그라드」에서 26㎞떨어진 하궁은 규모가 웅장했다. 「피터」대제가 건설한 이 하궁의 조각이나 그림의 정교함을 보면「피터」대제가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있었던 것 같다.
이날은 소련사람들도 많이 구경왔는데 차림새로 보아 노동자 같았다. 마침 훈장을 달고 있는 소련 사람이 내 곁에 있기에 같이 사진을 찍자고 했으나 말없이 고개를 흔드는 것이었다. 또 소련군장교가 있기에 같이 사진 찍자고 손짓으로 권해보았으나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비단 내가 한국인이라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소련 사람들은 외국인과 사진 찍는 것을 피하는 것 같았다.

<화사한 상품 볼 수 없어>
「레닌그라드」의 백화점에도 돌러보았는데 상품은 종류도 많지 않았고 화려한 것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만일 앞으로 우리가 교역이 가능해 진다면, 물론 아직은 제3국을 통하는 길밖에는 없으나, 「레인코트」나 피복류 등이 인기품목이 되지 않을까 혼자 생각해 보았다.
공원에는 산보하는 사람도 주로 노동자들이었다. 10대쯤의 남루한 복장을 한 소년이 김 회장에게 다가와 소련 제 「껌」을 내밀면서 사라고 권한다.
그러나 김 회장은 「루블」이 없어서 안 샀다. 「달러」대「루불」의 환율은 1대 0.72였다. 거리에는 개도, 말도, 소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네온·사인」간판은 다섯 군데밖에 보지 못했다. 그리고 서구의 건물의 1층은 거의 모두가 상점이 아니면 「카페」·음식점인데 비해 여기선 1층은 전혀 상점 같지 않았으며 1층을 무엇으로 이용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곳에서 축구 하는 것을 보았고, 또 한곳에서 배구그물을 친 것만 보았다.

<손에 꽃 든 행렬 거리 누벼>
또 이날은 무슨 날인지 수많은 사람들의 행렬이 손에 손에 꽃을 들고 공동묘지를 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레닌그라드」는 소련 제2의 도시라고 하지만 이처럼 큰 도시로는 너무나 한산했다.
우리가 관광한 것이 토요일과 일요일어서 사람들이 많이 나와 다닐 것 같았는데 너무나 한산했다. 사람들의 표정은 다른 서구 사람들처럼 명랑한 표정은 아니었으나 의복도 큰 차이 없이 거의 적당히 입고 있었으며 그중 여자 중에는 원색의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도 더러 있었다.
안내원에게 자기 차를 갖는 것은 대체 어떤 사람들이냐고 물었더니 학자·예술인·학사·과학자라는 대답이다.
또. 안내원에게 봉급이 얼마냐고 물었더니 2백 「루블」이라고 하는데 보통은 1백50 「루블」이라고 한다.
우리 안내원은 15년 이상 안내원으로 근무했기 때문에 그 만큼 많이 받는다고 말한다.「레닌그라드」의 극장 수는 14개라고 설명하며 영화관은 1백여 개가 있고 입장료로는 0.5 「루블」부터 1 「루블」까지 있는데 시간과 편수에 따라 값이 오른다고 말한다.

<칼라 tv국은 하나뿐>
집집마다 「안테나」가 많이 보이기에 「레닌그라드」에는 TV가 많으냐고 물으니 TV가 굉장히 많다고 하면서「채널」이 4개있으며 그 중의 하나는「칼라」라고 했다.「칼라」TV는 미화로 약1천「달러」이고 흑백은 약 5백 내지 6백「달러」라고 말했다.
물건을 사는 것을 자세히 보았더니 어떤 것은 소련 돈이 아니면 안 팔고 어떤 것은 외국돈이 아니면 안 파는데 아마도 외국돈을 받는 곳은 관광객을 전문으로 하는 것 같았다.
저녁때 「쇼핑」하는「프로그램」이 있어서 가장 큰 「호텔」이라는 곳에 부설된 매장에 갔었다. 여러 가지 선물용 물건을 팔고 있는데 바로 미국의 「슈퍼마켓」처럼 제 마음대로 물건을 골라 바구니에 넣어 나올 때 대금을 치르는 백화점이었다.
다른 곳에서는 물건을 산후 포장지나 봉투를 주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이곳에서는 물건을 담는 그물바구니 또는 마분지상자를 주는데 마분지상자는 어떻게나 굳은지 강철같았다.

<한국주소로 안부편지>
대체로 상품은 인형·조각·도자기·집기·유리 그릇·쇠로 만든 식기동 등이었는데 사람이 이곳에는 어떻게나 많은지-물론 대부분 관광객들이지만-돌아설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이번 여행은 비록 짧으나 유쾌한 여행을 한 셈이다. 끝으로「레닌그라드」여행을 마치기전에 나는 서울을 비롯한 한국의 친지들에게 안부편지 10여 통을 써서 「레닌그라드」우체국에 찾아가 부쳤다.
물론 봉투에 한국주소를 먼저 쓰고, 만약을 위해 동경의 친지주소를 써서 소련우표를 붙였는데 아마도 동경의 친지주소로 배달되지 않을까 여겨진다.
이번 여행은 참으로 유쾌했다. 왜냐하면 아무 것도 걱정할 것이 없었고, 특히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소련 말을 모르기 때문에 신문도, 「라디오」도, TV도 볼 수 없었으니 머리는 텅텅 빈 상태였다.
이렇게 편한 생활은 처음이라고 김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웃었다.
선상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나서는 음악에 맞추어 춤추는 부부들의 모습을 구경하면서 대개는 잡담으로 보냈고 선상에서 북구의 「오로라」의 광경이 찬란한 문자 그대로의 백야를 만끽하면서 황홀감을 맛보았다.

<항구는 백야를 이루고>
17일 하오6시30분쯤 배가 3일간의 「레닌그라드」정박을 마치고 부두를 떠났다. 항구는 운같이 긴 수노이며 다른 편 부두에는 수많은 소련 깃발을 그려 붙인 군함·여객선들이 많이 보이는데 아마도 그 속에는「볼셰비키」혁명의 원인이 되었다던「스무루이」군함도 있었을 것이다.
배가 항구를 떠나니 김 회장과 함께 갑판에 올라 멀리 멀어져 가는 소련 땅을 바라보면서 일종의 섭섭한 느낌이 생긴다고 말하며 다시 한번 웃었다.

<주 특파원이 마중 나와>
항구를 완전히 벗어나 「발틱」해상의 거센 파도를 헤치면서「헬싱키」를 향해 항해했다. 얼마 지나니 보이는 것은 갈매기 뿐이라 갈매기도 사람이 그리운지 시종 배를 따라서 높이, 낮게 뜨며 따라온다.
어떤 손님이 빵 조각을 던지니 물위에 뜬것을 내러와 먹는다.
중앙일보 「파리」특파원인 주 기자가 우리를 만나러 「헬싱키」까지 와서 우리들이 떠날 때「레닌그라드」로 들어가는 대로 전화를 해 달라고 부탁도 받았고 또 동경공항에서 동양방송 특파원 홍두표 기자도 「레닌그라드」도착 시 즉시 전화해 달라기에 그렇게 한다고 하였으나 우리가 밤에는 배에 체재하였으니 배의 무선시설을 이용해야겠는데 배가 입항하고있는 동안에는 전신전화를 못하게되어 기다리다가 배가 떠난 다음에 무선 실을 찾았다.

<편하고 아주 유쾌한 여행>
그러나 무선 실에는 문을 닫고 사람이 없어서 조금 기다려 서울에 우선 전보를 치려는 순간 주기자의 전화가 먼저 걸려왔다.
「헬싱키」를 떠난 이후 주 기자와 소련 밖의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대화를 나누었는데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잘 다녀 내일아침 돌아간다고 조국에 안부를 전해달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으려고 했는데 또 계속「헬싱키」에 상륙, 「호텔」에 돌아오자마자 주 기자에게 심문(?)을 당하고 사진·「필름·슬라이드」·그림엽서 등을 모두 몰수당하고 같은 비행기로 「런던」으로 떠났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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