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473)|휴전회담(후반부)(25)|협정조약(1)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2만7천명의 반공포로가 석방되자 공산측은 노기가 등등하여 6월20일의 비밀회의에서 탈출포로를 모두 다시 잡아 가두라고 호통을 치고는 일방적으로 휴전회담의 휴회를 선포하였다. 6·18사태로 분명히 수세에 몰린「클라크」「유엔」군 사령관으로서는 우선 공산측에 포로석방을 한국과 공모하지 않았다는 것을 해명, 납득시켜 그들을 회의장으로 다시 데려오도록 힘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클라크」사령관은 6월21일에 김일성과 팽덕회에게 포로석방의 책임은 전적으로 한국정부가 질 일이며「유엔」군사령부는 탈출포로의 재수용에 노려하고 있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사실 이때는 미군 헌병들이 탈출포로를 다시 잡으려고 농촌이나 민가를 뒤지고있었다.

<「클라크」, 김·팽에게 서한 보내>
「클라크」사령관의 이와 같은 해명을 받아들였는지 공산측은 6월24일부터는 미국 공모운운의 비난은 멈추고 화살을 주로 한국정부에만 돌리기 시작했다. 「클라크」장군은 이 기회를 놓칠세라 6월29일에 다시 김·팽에게 다음과 같은 요지의 서한을 보내고 회담재개를 종용하였다.
『한국정부는 완전한 독립국가이기 때문에「유엔」군사령부의 권한이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한국정부가 본인도 모르게 「유엔」군 사령관과 맺은 약속을 위반한 것은 사실이다. 본 사령부와 관계당국은 한국정부의 협조를 얻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러나 전 번에 탈출한 2만7천명의 포로를 다시 수용한다는 것은 당신 네 들이 전쟁중 석방한 5만 명의 한국군포로를 다시 수용하는 것이 불가능한 만큼 어렵다는 것을 이해해야한다(주=공산측은 5만 명의 한국군포로를 전선에서 석방하였다는 구실로 자기군대에 강제징집 했다).
그러니 쌍방대표는 즉시 다시 모여 회담을 재개하여 협정이 조인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공산측은 이 서한을 받고도 1주일이상이나 침묵을 지키다가 7월8일에야 회답을 보내왔다. 공산 측 회답이 이렇게 늦어진 것은 그들은 그 동안 서울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로버트슨」회담 자세를 지켜보았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됐다. 사실상 7월8일께는 그 동안 난항을 거듭하던 한·미 회담이 타협점을 찾아 의견이 접근하고 있었다. 이 기미를 알아차리고 공산측은 「클라크」사령관에게 7월10일에 회담을 재개하자고 응해왔다.
이렇게 해서 휴전회담개최 꼭 두 돌이며 중단20일 만인 53년7월10일에 본회의가 재개되었는데 이날은 별 진전은 없었다.「유엔」군 측은 중립국 송환위원회가 지장 없이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송환불원 한국인 및 중국인포로를 비무장지대 남쪽으로 이송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공산측은 여전히 한국정부가 과연 휴전에 협조할지 의심스럽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유엔」군 측은 휴전협정에 곧 성의껏 조인할 용의가 있으며 만약 휴전 후에 한국군이 어떤 침략 행동을 취한다면 미국은 모든 원조를 철회하겠다고 다짐하였다. 공산측도 휴전이행 책임은 쌍방 각자의 내부문제라는데 동의하였다. 10일부터 15일까지의 회의에서도 가벼운 입씨름이 계속될 뿐 답보를 거듭했는데 19일에 드디어 돌파구가 생겼다.

<포로문제는 정치회의서 다뤄>
이날 공산측은 장광설을 늘어난 후 휴전협정조인을 위한 여러 가지 준비절차에 관한 토의를 즉시 시작할 용의가 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서는 이때까지 탈출포로를 재 수용하라는 주장을 철회하고 그 문제는 휴전 후에 열리게 되는 정치회의에 넘기겠다고 말하였다. 이로써 휴전회담의 가장 난관이었던 포로문제는 결말이 났고 공산측은 사실상 반공포로석방 조치를 묵인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모든 문제는 해결되어 「유엔」군 측은 7월24일하오 2시에 협정에 조인하고 휴전은 그후 12시간만에 발효하도록 제안하였으나 조인 일자는 준비가 덜되어 27일로 연기되었다.
그러나 27일의 조인마지막 순간까지도 판문점회담의 성격을 상징하는 듯 말썽이 뒤따랐다. 처음 계획으로는 쌍방의 군 사령관으로서 「유엔」군 측을 대표한 「클라크」대장과 공산측을 대표한 김일성 및 팽덕회가 판문점에서 「테이블」을 사이에 놓고 마주앉아 휴전문서에 서명하기로 돼있었다.
공산측은 조인식장에 쓰기 위해 회담장소 뒤에 새 간이 건물을 짓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최후순간에 와서 이해할 수 없게도 공산측은 협정 문에 제각기 쌍방 사령관이 조인하고 뒤이어 판문점에 돌려보내진 그 원본을 쌍방수석대표가 서명한 후 교환하자고 요구하였다. 이렇게되자 김일성이나 팽덕회가 왜 판문점에 나타나기를 꺼리는가를 둘러싸고 구구한 추측이 나돌았다. 남행 도중의 공습을 두려워한다는 것으로부터 김이 몇 달 전에 이미 숙청했거나 거세되었다는 것까지 갖가지 소문이 오갔다. 이것을 가지고 또 며칠동안 옥신각신한 끝에 공산측은 협정문서는 「클라크」와 김·팽 새 사람이 한자리에 앉아 서명해야 한다는 「유엔」군 측 주장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유엔」군사령부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를 또 한가지 들고 나왔다. 그것은 어떤 자격을 가진 한국인이나, 중국인이나 간에 조인당시 판문점에 얼씬도 하지 않아야 김·팽이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공산측은 쌍방에서 각각 10명의「카메라맨」만 조인장소에 출입시키자고 제안하였다.
「유엔」군으로서는 그런 제의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클라크」사령관은 이 조인식에 한국 대표가 꼭 참석하는 것이 휴전협정자체의 준수나 한국정부의 위신을 위해서도 절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조인 취재 제한조치도 동의할 수 없었다.

<미, 이 박사에 대표파견 간청>
전세계의 언론기관이 역사적인 이 조인광경을 취재하려고 오래 전부터 준비를 서둘러왔고 서울에는 수백 명의 기자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이래서 「클라크」사령관은「해리슨」중장과 남일이 판문점에서 협정문고에 서명하고 난 12시간 후에 쌍방은 교전을 중지하고 다시 그 몇 시간 후 각자의 사령부에서 쌍방의 최고 군 사령관이 서명케 하자고 제안하여 공산측의 동태를 얻었다.
결국 김이나 팽이 판문점에 나타난다는 이야기는 공산측이 처음부터 흥정을 염두에 두고 발설한데 불과했던 것이다.「클라크」사령관은 공산측과 모든 조인 준비절차에 합의한 후 이 사실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알렸다. 그로서는 마지막까지 대통령에 대한 예의와 격식은 지키려고 애쓴 게 사실이었다. 「클라크」대장은 이 대통령에게 한국군대표도 조인식에 참석하도록 간청하였다. 그는 서울에 가서 이 대통령을 만나 뵙고 다시 한국군 대표의 조인식 참석을 부탁했지만 그 자리에서는 확답을 얻을 수 없었다.
그러나 「클라크」장군은 협정조인을 위해 8군사령부에서 막 문산으로 떠나려고 할 때 이 대통령이 최덕신 소장을 참석케 했다는「메시지」를 받고 기쁨과 함께 또 한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한국군 대표의 조인식 참석여부는 한국정부가 휴전반대의 입장을 취해 왔던 만큼 논란이 많았다. 최덕신 장군의 저서 『제2의 판문점』에는 자신의 조인식 참석경위가 다음과 같이 기록돼있다.
『나는 매우 불쾌한 기분으로 1953년7월27일의 휴전 조인 날을 맞이하였다. 우리 나라는 이 휴전을 승낙하지 않았으니까 협정에 서명함 필요도 없고 그 장소에 나갈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여 울분을 되새기고 있었다.
그런데 대통령이 관저로 돌아오라고 해서 갔더니 「자네 오늘 「클라크」장군이 휴전협정에 「사인」하는 것 알고 있지」하고 묻는다.「네, 알고 있습니다」「거기 좀 나가주어야겠어」이렇게 명령한다. 나는 그 자리에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저는 우리가 이 휴전을 승인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휴전을 승인하지 않고 있는 우리가 왜 참석합니까?」라고 불만이란 뜻으로 대답했다.

<휴전 방해 않는다는 약속이행>
그랬더니 대통령은 약간 떨리는 듯한 말투로 「그런게 아니야. 우리가 정전을 승인하지는 않지만 3개월 동안은 방해하지 않겠다고 내가 그 사람들에게 약속을 했어. 그러니까 정전을 승인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그 사람들에게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을 알리기 위해서 참석하는 거야」이렇게 설명하였다. 그래도 그날의 울적한 기분이 풀리지 않기에 끝까지 피해보려고「정 그러시다 면 저 대신 다른 분을 파견하시면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또 한번 보채어 보았다.
그러나 「음… 그것은 안돼. 다른 사람이 나가면 외국사람들이 믿지 않아. 곡 자네가 나가야하네」하고 명령한다.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안 나갈 도리가 없었다. 역시 이런 때는 나의 심경이나 지조를 희생시키더라도 국가원수의 체면을 세워드리는 것이 옳다고 억지로 납득했다. 그래서「그러면 제가 나가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는 문산으로 향하였다.』
◇주요일지(1953년5월9일∼12일)
※9일 ▲「미그」2대 격추 ▲휴전회담 상당히 진전 ▲부산서 북진통일 궐기대회 ▲미국,「라오스」사태의 「유엔」제소지지
※10일 ▲미군 기, 수 개발전소 폭격 ▲자유당전당대회 대전서 개최 ▲「라오스」침입호군, 돌연 절수개시
※11일 ▲폭우로 지상전소강 ▲남일, 송환 불원 포로의 최종결정은 정치회담서 다루자고 제안 ▲한·일 회담, 재한 전일인 재산권문제토의 ▲「덜레스」장관, 「나기프」「이집트」수상과 회담
※12일 ▲이 대통령, 「클라크」장군과 요담 ▲주은래, 25대의 미 군기가 만주침입 폭격했다고 비난 ▲미군 수뇌 이동, 합참본부의 장에 「래드퍼드」제독, 육군참모총장에 「리지웨이」대장임명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