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472)휴전회담(후반부)(24)|한미관계의 긴장(4)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6월25일부터 시작된 서울의 「소 휴전 회담」은 18일 만인 7월12일에야 일단락 되어 공동 「코뮤니케」가 발표되었다. 「아이젠하워」대통령의 특사 「월터·로버트슨」차관보는 처음에는 늦어도 1주일정도면 서울행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이 대통령의 휴전반대 태도는 6·18포로석방 후에도 조금도 수그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스스로의 힘의 한계를 잘 알고 있는 이 대통령은 「로버트슨」특사와의 14회에 걸친 회담에서 휴전 불 반대의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최대한의 보장과 원조를 얻어내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그 결과는 6·18조치후의 국제여론이 사면초가인데도 불구하고 이 대통령이 대미협상에서 큰 실리를 얻었음을 보여주었다. 즉 이 대통령은 미국에 휴전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주는 대가로 다음과 같은 많은 것을 쟁취하였다.
(A)휴전성립 후(전이 아님)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는 약속. 「덜레스」국무장관이 상원지도자들과 만나 그런 조약체결에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다는 보장이 있었다(주=휴전협정조인 후 곧 「덜레스」장관이 내한, 이 조약을 맺었고, 그 후 상원의 비준도 받았다).

<합·미 방위조약 체결 보장받아>
(B)장기간의 경제원조와 2억 「달러」의 부흥원조제공. 이밖에 「유엔」군 사령관은 본국으로부터 휴전조인 즉시 9백50만 「달러」에 해당하는 1천만 「파운드」의 식료품을 한국 민에 제공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C)90일이 지나도 휴전후의 정치회담에서 어떤 구체적인 성과가 없을 때에는 한·미 두 나라는 그 회의에서 물러 나와 한국통일에 관한 장차 행동을 협의한다고 합의.
(D)이미 계획된 바와 같이 한국지상군을 20개 사단으로 증강하는 한편 해·공군력도 적절히 증강한다는 합의.
(E)정치회의가 열리기 전에 공동목표의 모든 국면을 토의하기 위하여 고위 한·미 회담을 갖는다는 합의(주=「덜레스」장관일행은 한·미 방위조약채결과 이 문제를 협의하려고 8월 초순에 서울에 왔다)
이밖에 서울회담을 통해 이 대통령으로서는 육안에는 띄지 않으나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을 차지하였다. 그것은 정치가로서의 그의 권위와 위신이 반석처럼 다져진 것이다. 이 대통령은 자신을 한국에서 자유·공산세계가 전쟁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휴전을 조인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결정하는 때 절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까지 부상시켰다. 그는 어차피「유엔」으로서는 충족시킬 힘이 없는 한가지 요구만은 포기하였다. 그것은 중공군의 철수와 한국의 즉시 통일이었다.
이 대통령은 또 미국으로부터 그렇게 많은 것을 얻는 사소한 대가로 6·18조치 때 석방되지 못한 약8천명의 반공한국인 포로들을 비무장지대에서 중립국송환위원단에 인계할 것에 동의하였다. 그는 또 도중에 한국 영토 위에 발을 붙이지 않는다면 인도 군이 비무장지대로 들어가는 문제에 있어서도 반대를 제기하려 하지 않았다(주=그후 포로관리책임을 맡은 인도 군은 한국 땅을 밟지 못하고 「헬」기 편으로 비무장지대에 공륜 됐다).
아무든「아이젠하워」대통령은 「로버트슨」특사파견을 통해 이 대통령으로부터 겨우「휴전 불 방해」의 언질을 받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제 자기 편안의 혹은 간신히 떼 논 셈이었다.
그런데 이 무렵에 공산측도 「워싱턴」못지 않게 이 대통령에게 휴전을 받아들이도록 중압을 가하였다.
그러니까 이 문제만은 미국과 공산측이 우연의 일체겠지만 서로 손발이 맞아 한국에 압력을 가했다는 얄궂은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공산측의 이런 움직임은 「로버트슨」특사가 「아이크」에 보내는 휴전 불 방해 내용이 담긴 이 대통령의 친서를 가지고 서울을 떠난 지 24시간만인 7월14일에 중동 부 전선에서 나타났다.
이날 공산군은 우선 2개 사단병력으로 한국군 제 5사단을 급습 강타하고, 이어 5개 사단으로 금화·금성을 잇는 중부 전선 전역에 걸쳐 맹렬한 공격을 가하였다.
이 공세를 정면으로 받은 것은 한국군 수도, 제 3, 제 5, 제 6, 제 8의 각 사단과 제11사단의 1개 연대였다.

<적, 북진주장 한국군만 공격>
휴전회담 기간 중 그것도 이제 막바지에 접어든 이때 공산국의 이런 대공세는 전혀 생각지 못한 이례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곧 한국군 진지만을 엄습한 적의 이 공세는 북진을 주장하고 있는 한국의 코피를 흘리게 하여 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시키려는 계략에서 나왔음이 판명되었다. 다시 말해서 휴전에 동조하라는 「워싱턴」측 주장을 공산측은 전쟁터에서 뒷받침해주려고 했다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것은 이때의 다음과 같은 외신 보도를 보아도 곧 알 수 있었다(홍=본연 제393회∼396회 요 참조).
▲6개내지 7개 사단으로 된 중공군대부대는 중부전선 25리에 걸쳐 한국군방위선을 쇄도했다. 중공군의 이 인해전술로 한국군은 어떤 진지에서는 4리 이상 후퇴했다.
이곳 「업저버」들은 중공군의 이번 공세는 한국군으로 하여금 중공군을 상대로 단독 북진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한국측에 실증하기 위한 짓이라고 단언하였다.(PANA)
▲약5만 명의 중공군이 14일 아침 중부와 중동부전선 사이에 있는 한국군 진지에 육박하고 있다. 최신보도는 5개 사단 이상의 공산군이 저격능선과 북한강 사이의 15리에 걸친 한국군 진지를 강습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군사단에 배속되고 있는 미군고문들은 사태는 매우 심각하다고 보고하였다. 이번 적 공세는 2년래 최대의 것이라고 한다.(INS)
▲미군장교들은 이번 중공군의 대공세목적이 두 가지 있다고 풀이하고 있다. 첫 째는 협정조인에 앞서 한국군을 잠식하고 그들을 불리한 입장에 몰아넣어 북진계획을 단념케 하려는 것이다. 둘 째는, 전쟁의 최종국면에서 그런 공세를 취함으로써 주도권을 잡아 승전했다는 선전을 일삼고, 휴전조인은 「유엔」군 측이 궁지에 몰려 할 수 없이 했다는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UP)
▲수도 사단소속 미 군사고문「랜프·H·코원」소령은 공산군의 이번 공세는 극히 치밀하게 준비되어 적어도 5회 이상 모의연습을 한 것 같다고 말하였다.

<중공군 1개 군단 규모의 강로>
그런데 수도사단에서는 부 사단장과 연대장 1명이 전투 중에 행방불명이 됐고, 붕괴된 연대에서는 한 명의 대대장도 생존한사람이 없으리라고 전해지고 있다.(AP)
▲공산군은 20리에 걸친 중동부 전선에서 대 공세를 취하였다. 이 공세의 목적을 서울에서 판단할 때 ①정치적인 것 ②군사적인 것 ③이기적인 것 ④자기주장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한 것 등의 네 가지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정치적인 면에서 볼 때 이 공세는 세계여론과 판문점회담과, 그리고 이 대통령의 완강한 저항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려고 한 것이다. 둘 째의 군사적으로는「금성돌출부」를 지워 버려 새 요충지를 점령하고 한국군에 큰 출혈을 강요하려는 것이다. 세 째는 휴전 전에 되도록 점령지역을 넓히고, 네 째는 한국의 휴전 반대태도를 「징계」할 수 있는 실력을 가졌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것이다. (AP)
한편 공산군 공세가 한국군 출혈만을 목적으로 감행됐다는 것은「아이크」회고록에도 분명히 지적돼있다.
『7월13일부터 14일 새벽에 걸쳐 1개군단 병력의 중공군은 금성부근의 한국군수도사만을 공격하여 동 사단의 모든 보병부대와 지원의 미군1개 포병대대를 사실상 분산시켰다. 14일에 미군 제3사단은 한국군이 무너짐으로써 생긴 틈바구니에 이동토록 명령을 받았다. 미군은 기동력을 발휘하여 한밤중에 비를 맞으며 신속히 이동하여 고지위로 올라갔지만 중공군과의 접전은 없었다. 공산군은 새로 들어온 부대가 미군임을 알고 교전을 피한 게 분명했다.

<중공군, 한·미 이간질 속셈도>
여러 사람들은 중공의 정책이 한국군만을 공격하고 미군과의 대전은 피함으로써 동맹국간율 이간질시키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그 이튿날인 15일에 중공군의 새로운 대공세가 다시 중동부의 한국군에만 가해짐으로써 뒷받침되는 듯했다. 사실 중동부의 산악지대는 거의 이용가치가 없으며 공산군이 값비싼 대가를 치르며 공격할 만한 지역이 못됐다. 그러므로 그들 의도는 이 대통령이 맹방의 지원을 잃을 경우 한국군전투력이 어떻다는 것을 알리려는데 있던 게 분명했다.
「클라크」사령관도 공산군공세가 전개된 지 3일 만인 17일에 다시 한국에 비래하여 전선을 시찰하였다. 처음 기습으로 한국군의 타격은 컸지만 미군포병의 지원을 받으며, 반격을 개시하여 빼앗긴 진지를 일부 탈환하고 있었다. 이날 저녁 「클라크」장군은 이 대통령을 방문하고, 일부 한국군 장교들이 선전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솔직히 지적했다. 이 대통령은 미군이 오랫동안 수세만 취했기 때문에 공산군이 그 동안 전력을 비축할 수 있어 이번 그들 공세에서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공산군은 어느 정도 소기의 성과를 얻었다고 생각했는지 1주일만인 7월19일에 공세를 막 멈추었다. 이 동안 공산군은 막심한 사상자를 냈지만, 주로 한국군인 「유엔」군의 사상자도 불과 1주일에1만4천명이란 기록적인 숫자를 나타냈다.
◆주요일지(1953년5월5일∼8일)
※5일 ▲전 전선 소강상태유지 ▲「유엔」군 측, 송환반대 포로들의 해외중립국이송반대 ▲북평 방송 「유엔」군 측 주장비난 ▲태국, 미국에 군원 요구
※6일 ▲지상전투소강상태계속 ▲납북자 가족회, 「아」대통령에 진정 ▲호군 「하노이」근교공격 ▲「덜레스」국무 「라오스」정세악화에 큰 관심 표명
※7일 ▲미 함대, 원산 치의 공산군포대포격 ▲「아」대통령, 포로에 관한 공산측의 새 제안 검토 ▲영「유고」에 군용기제공
※8일 ▲지상전부5일째 평온 ▲서민호 사건 민재에 회부 ▲미국 금년 들어 8회 째 원자실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