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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소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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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이번 달의 작품은 다음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눠볼 수 있을 것 같다. 그 첫째는 『만적』(유금호) 『임꺽정』(조해일) 『지귀』(박용숙) 등 지난달 발표된 작품들에 이은 윤정규씨의 『탈선박충신전』(현대문학), 박용숙씨의 『신종』(〃) 등 역사물을 들 수 있다. 완결된 행위로 현실을 파악할 수 없을 때 문학에서 변종양식이 발현한다는 것은 문학사적인 하나의 법칙성에 속할 수도 있다.
30년대 한국문학사에서도 이 문제가 가로 놓였던 것이다. 완결된 행위로 현실을 포착할 수 없다는 것이 현실자체에서 연유할 수도 있고 한국문학의 총체적 역량 미숙에서도 연유할 수 있을 것이라면 이 문제에 대한 관련은 아직도 더 검토돼 보아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지만 어느 쪽이든 역사취급에서 다음 사실이 우선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최소한도 그것은 『우리는 그것을 행할 수가 없지만 알 수는 있다』라는 명제와 그 선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역사를 우리의 필요한 분량만큼 떼내어 이용할 수 없다는 이 선이 만일 무너진다면 이 역사에의 자의성이 우리자신의 역사를 향해 복수하여 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탈선박충신전』에서도 이 명제가 문제된다.
이점에 대해 작품 『신종』은 매우 시사적인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최고의 예술품을 정치권력과의 동질성으로 파악한 것도 하나의 문제성이지만 종교적 기능을 무화시켜 놓은 것에도 문제점이 놓인다. 바로 이점이 이러한 경향의 역사물들이 역사소설의 범주에 들 수 없는 이유일 수 있다.
혜공왕 당대의 신라가 고대국가의 일반범주에 든다는 것, 정치적 기능과 종교적 기능이 유합상태에 놓인다는 것, 그 종교에 입을 빌려주고 있은 것이 왜병이 처들어온다는 유언비어였다는 것 등등은 역사의 일반법칙에 속하는 것이다. 「플라톤」이 『국가론』(Republica)에서 시인을 추방한 것은 정치적 기능과 종교적 기능의 갈등, 투쟁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고구려·백제, 그리고 왜국 사이에 놓인 고대국가로서의 신라가 과연 호국불교의 이념과 국가「이데올로기」의 결합을 어떤 측면으로 전개했는가를 고찰함에 소위 봉덕사종의 「이데올로기」가 놓일 것이다. 만일 이러한 가설에서 출발하는 나의 생각이 약간의 타당성이 있는 것이라면 작품 『신종』은 부분을 전체로 오인한 것이 된다.
이 작가는 전작 『지귀』에서도 그랬지만 민중의식의 일면성에 들려(빙)있는 것 같다. 그것이 문제되려면 고대국가에서 중세국가에로 넘어오는 고려이후로 설정해야 부분과 전체의 균형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종』은 『지귀』보다는 확실한 작품이다. 확실하다는 것은 설화의 극복을 의미한다.
둘째로 『목수아방이』(박용숙), 『토속기』(오유권) 등 지난달 작품과 승지행씨의 『손Ⅱ』(현대문학), 오유권씨의 『텃골댁네잔치』(월간중앙) 등 아직도 그리고 오래도록 우리의 것일 수 있는 소멸되어가는 미학의 세계가 있다. 소설이란 소설가의 윤리가 작품의 미학적 문제로 되는 유일한 문학형식임을 이런 계열의 작품에서 재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이러한 작품들이 오유권씨에게서처럼 생리적이 아니라면 그것은 어차피 비극적 양상을 띠게 된다. 그것은 망설임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 망설임을 동반하지도 않고 생리적이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런류의 작품을 계속 쓴다면 아마도 그것은 『우리 것은 모두 좋다』는 터무니없는 폐쇄주의로 되어 「모더니티」의 차단을 강요하게 될 것이다.
작품 『손Ⅱ』는 3대에 걸친 수난의 의미가 담담하게 소설문체를 타고 내린다. 하근찬의 왕년의 출세작 『수난2대』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승씨의 이번 작품은 그 3대의 비극을 역사쪽에다 섣불리 쉽게 덮어씌우려 하지 않았다는 점을 문제삼고싶다.
실상 한국소설의 맹점중의 하나가 걸핏하면 모든 책임을 역사쪽에다 덮어씌워 고압적이고도 엄숙한 「포즈」를 취한다는데 있었다. 이 맹점이 작가정신을 마비시켜 왔다고 나는 생각한다.
세째로 지난번의 『아이·엠·어·보이』(오탁번)와 유현종씨의 『오월한낮』(문학사상), 송영씨의 『미화작업』(문학과지성) 등을 한 묶음으로 볼 수 있을 듯 하다.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소설적 처리는 한 소년이 사회악의 발견에 이르는 과정을 무화시켜 사회악발견이 아니라 재확인만을 부각시킨 『아이·엠·어·보이』라든가, 동회서기와 무허가 「시멘트·블록」집과 「창」의 관계를 한국현실의 한 저변으로 포착한 『미화작업』이 함께 「유머」의 차원으로 놓여있음은 『5월 한낮』이 풍자성을 띤 것과 비교될 수 있다.
끝으로 이문희씨의 사소한 것의 소설적 흥미포착 계열, 백도기씨의 참신한 젊음의 앓음계열이 한국문학의 빈혈화를 보강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될 수가 있다. 이 진술은 오정희씨의 『봄날』(문학사상)이 문체의 흥미를 유발할 것 같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러나 그 주제가 중년여인의 「노이로제」증상이라서(그것은 개성일 수 없다) 문체의 충전이 「스파크」를 일으키지 못한다. 왕년의 수작인 강신재씨의 『바바리코트』와 『젊은 느티나무』는 아직도 문체의 힘을 지니고 있고 따라서 그것은 우리 것이다. [김윤식<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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