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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5)휴전회담(후반부)(1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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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반공포로 석방>(9)
1951년8월7일에 공포와 전율에 떨던 거제도포로수용소의 반공포로들은 이미 노출된 적색포로들의 용광로 조직에 대항하는 「대한반공청년단」을 조직, 송환거부 의사를 분명히 밝히면서 석방투쟁을 적극 전개했다.
『하루속히 석방되어 대한민국에 복무할 수 있는 충실한 청년이 되기를 바라며 생명과 지력을 아끼지 않고 북한공산군을 이 강토에서 격멸시켜 철의 장막 속에 있는 동포들을 구원하고 남북통일을 이룩하는데 기여할 것』등을 기본강령으로 채택한 수용소 안의 반공청년단은 우선 휴전회담에서 논의되고 있는 북으로의 강제송환을 결사반대하고 나섰다.
단간부들은 이념전인 한국전쟁에서 이같이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가 많다는 것은 「유엔」군측의 절대적인 승리임으로 반공포로들은 즉시 석방돼야 한다는 내용의 탄원서와 진정서를 매일같이 작성하여 수용소교회목사나 국군경비병들을 통해 이대통령을 비롯한 관계 요로에 보냈다.
52년 초에 중앙당까지 조직한 거제도수용소의 대한반공청년단은 12개 수용소에 일제히 태극기를 올리고 연3일간의 석방촉진「데모」를 전개, 급기야는 국회조사단까지 내려오도록 했다.

<대통령비서실, 석방지원회신>
3월부터는 자유의사에 의한 「송환」과 「잔류」를 구분한다는 미군포로관리당국의 소위 면회심사가 시작되자 반공청년단은 병원·보급「루트」·부대종업원·작업장 등을 통해 각 수용소지부단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심사에서의 행동통일을 다져 나갔다.
면접심사를 전후해 맹렬한 석방운동을 벌인 반공포로들은 마침내 대통령비서실로부터 『멀지않은 장래에 여러분의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니 참고 기다려달라』는 내용의 서신을 받았다.
이렇게 돼 반공포로 자신들의 석방투쟁과 이에 호응하는 대한민국정부 당국의 지원 등, 안팎으로 손발이 맞아 6·18거사는 무르익게됐다.
그리고 52년 여름부터 초가을에 걸친 남한출신 민간인 및 의용군출신 반공포로들의 석방은 대한반공청년단의 석방투쟁을 한층 더 고무, 자극시켰다.
그러면 다시 전회에 이어 우익포로들이 반공청년단을 중심으로 전개한 석방투쟁 상황을 당시 단간부들로부터 들어보겠다.
▲이관순씨 (당시 대한반공청년단 중앙당의장=현 서울거주·상업·50) <우리 반공포로들은 51년8월 거제도안의 11개 포로수용소와 포로야전병원에까지 대한반공청년단을 조직, 철조망 안에서나마 보다 적극적인 석방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읍니다.
각 수용소 반공청년단간의 모든 연락관계는 김선호 중위가 전범자조사를 빙자해 무상출입하며 도맡아 해주었고, 매주 금요일에는 12개 수용소 단장들을 불러내 회의까지 하도록 주선해 줬어요.
52년1월에는 중앙당을 조직해서 내가 의장이 되고 12명의 지부단장과 1명의 비서를 포함한 13명의 중앙당의원을 선출, 대한반공청년단의 지휘체계를 강화하고 거제도 포로수용소 안에 하나의 「반공포로공화국」을 수립했읍니다.

<「팬츠」만 입고 일제히 「데모」>
그후 3월l7일∼19일까지 3일 동안 반공청년단이 조직돼 있는 12개 수용소는 중앙당의 지령에 따라 일제히 태극기를 게양하고 전 반공포로들이 「팬츠」만 입은 채로 석방촉진 「데모」를 벌였어요.
미군당국은 17일부터 보급을 중단했지만 우리들은 이미 그 같은 조처가 내려질 것을 예측하고 「데모」전에 받아 비축한 보급품들을 가지고 급식, 담배 등을 충당했읍니다.
물론 이 같은 대대적인 시위이전에도 탄원서 제출, 단식농성 등의 석방운동은 수없이 전개했구요.
우리 반공포로들은 틈만 있으면 북한송환 결사반대를 부르짖었는데 미군들이 제일 겁내는 것은 단식투쟁입디다.
또 반공청년단은 수용소교회를 맡고있는 강신정목사를 통해 이대통령께 하루빨리 반공포로들을 석방시켜 달라는 내용의 탄원서를 보내기도 했어요.
마침내 52년 초 대통령비서실로부터 우리들의 탄원서에 대한 답장이 왔는데 그 내용은 『각하께서는 대한민국 정부가 포로수용소를 직접 관리하지 못하고 많은 애국포로들을 고생시킴을 대단히 미안케 생각하고 계십니다. 멀지않은 장래에 여러분들의 소원이 성취될 것이니 참고 기다려주기 바랍니다』라는 것이었어요.
52년 봄 송환 가부를 심사할 무렵에는 반공청년단에 가입, 북한으로의 강제송환을 결사반대하는 포로들이 2만여명에 달했어요.
심사 후 미군당국이 우리 반공포로들을 거제도에서 부산·광주·논산·마산·대구 등지의 육지로 분리 수용시킨 이유는 아마 공산포로들과의 살상전과 매일 같은 석방「데모」때문이었던 것 같은데 그 같은 조처는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정부의 반공포로석방에 편리를 제공해준 셈이었지요.>
▲한광호씨(당시 대한반공청년단중앙당비서=현 서울거주·54) <우리 대한반공청년단은 석방과 적색포로들에 대한 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한글학교·영어학교 등을 세워 반공포로동지들의 교육에도 열중, 장차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소양과 교양을 갖추어 나갔는데 이 같은 우리들의 향학열은 미군들로부터도 대환영을 받게 돼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었읍니다.
반공청년단이 조직된 우익포로수용소들은 제85수용소 여단장 정금용 동지 등 3백70여명의 반공포로들이 무참히 살육 당한 51년 9·17공산포로 대폭동을 비교적 무사히 넘기고 난 후 가일층 맹렬한 석방운동을 벌이기 시작했어요.
우선 우리는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에 잡힌 소련군포로들 중 귀환을 거부하던 반공주의자들은 끝내는 송환도중 「알프스」산이나 「발틱」해협에서 투신자살했던 역사적 사실』을 환기시키면서 『전쟁포로는 본국송환이 원칙이지만 한국전쟁은 특수한 사상전인만큼 그렇게 단순히 취급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의 탄원서를 대한반공청년단의 이름으로 거듭 관계요로에 보냈읍니다.

<진정서 보내는데 온갖 방법>
또 나는 국군을 통해 사들인 한국신문과 미군들의 영자신문을 훔쳐보며 휴전회담 진행과 국제정세를 연구,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가 이같이 많다는 것은 「유엔」군측의 절대적인 승리다. 이념전인 한국전쟁을 끝까지 승리로 이끌려면 우리 반공포로들을 즉시 석방해야 한다』는 탄원서를 매일 같이 써댔어요.
이러한 탄원서 작성은 내가 도맡아 했고 발송방법은 국군을 통한 우송과 때로는 수용소에 출입하는 민간인들의 인편을 직접 이용하기도 했읍니다.
51년1월 김선호 중위의 적극적인 협조로 반공청년단 중앙당을 조직한 후 연3일간의 대대적인 석방「데모」를 벌였더니 마침내 국회특별조사단이 내려옵디다. 우리 반공포로들은 이 기회를 포착, 송환거부, 석방촉진, 반공포로 분리수용, 국군에 의한 포로관리 등의 「플래카드」를 철조망 안에서 높이 들어 국회의원들에게 우리의 뜻을 전달했어요. 대한반공청년단이 조직을 노출시켜 송환거부, 석방촉진 등을 행동으로 부르짖고 나오자 52년3월부터 미군당국에서는 소위 면접심사를 시작, 포로들의 자유의사에 의한 「송환」과 「잔류」를 구분해서 분리수용하기 시작하데요. 그런데 심사는 먼저 심사관이 ①대한민국에 남아도 「유엔」당국은 신분보장·생활대책에 책임을 안 지겠으며 ②북한의 가족이 박해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의사를 표시하라는 절차로 진행돼 반공포로들을 또 한번 침울하게 만들었어요.

<사전심사로 행동통일 꾀해>
그러나 우리 반공청년단은 ①김 중위 ②병원 ③부대종업원 ④작업장 등의 갖가지 연락 「루트」를 통해 각 수용소에 긴밀한 지령을 내려 면접심사에서의 행동통일을 다져 나갔고, 부동적인 포로들의 잔류설득도 전개했어요. 또 우용은 김병후 동지 등이 주동이 돼 양민학살을 자행한 골수 공산당원인 전범자 4백50여명을 색출, 미군전범조사처에 넘겨주기도 했구요.
심사시작 전날 밤에는 반공청년단에서 심사에 사용될 것과 꼭 같은 「카드」를 「프린트」해 가지고 미군당국의 심사를 위장, 자체예비심사(?)를 실시해서 포로들의 본심을 알아보기도 했어요. 그런데 이 심사에서 그만 나의 선배로 반공청년단에까지 가입한 포로 의사였던 곽모씨(작고)가 송환을 희망해서 동지들이 배반자라고 처단하겠다는 것을 겨우 말렸어요.
그는 나한테 달려와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같이 피난 나온 부인이 양공주가 됐을 것』이라는 공산포로들의 선전을 믿고 대한민국에 남으면 그 목불인견의 꼴을 보겠기에 북으로 가려고 했다는 거예요.
정말 어처구니없는 공산당의 날조더군요. 그분은 내가 잘 돌봐줘 6·18석방에 무사히 탈출, 부인과 해후해서 행복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어요.
심사와 동시에 「반공」과 「공산포로」는 즉각 분리수용 됐어요.
당시 거제도수용소의 포로 자치기구는 각 여단 내에 행정을 담당하는 여단장, 경비를 맡은 감찰대 및 교육부의 3원적인 조직부서를 두고 있었는데 송환 반대수용소의 각부서는 반공청년단 중앙당의 지시를 우선적으로 이행했고, 특히 여단공급부는 석방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읍니다. 반공청년단은 공급부에 지급 받은 피복·담배 등을 밖으로 내팔게해서 탄원서의 우송료나 인편의 여비 등을 조달했어요.>
◆주요일지(1953년4월9일∼12일)
※9일 ▲북한, 억류중인 7명의 영국인 석방 ▲「하마술드」 신「유엔」사무총장 착임
※10일 ▲공산측, 휴전본회담재개제안 ▲부산서 휴전반대궐기대회 ▲미상원경제위, 한국휴전성립 되면 불황도래 예고 ▲서독, 35명의 소련간첩망 타진
※11일 ▲「미그」기 6대 격추파 ▲상병포로 교환협정조인 ▲문산에 60대의 구급차대기 ▲이대통령 「로이터」기자에 단독북진불사 언명
※12일 ▲「테일러」8군사령관, 마하지위관과 비밀회담 ▲20일부터 상병포로 교환개시 합의 ▲「막사이사이」전 국방상, 비율빈 국민 대통령후보로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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