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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분포와 규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지금의 경주시가지는 본시 신라의 왕족 내지 귀족층이 영생하는 안택의 성스러운 경역이었을 것이다. 현 도심의 곳곳에 솟아있는 거대한 고분들이 그것을 입증하는데, 그나마 작은 것들은 일찍이 봉토가 깎이어 없어졌음도 능히 짐작 할만 하다.
그러나 1천년 왕조가 쇠망하고 특히 외국문화와의 접촉으로 가치관이 변화됨에 따라 묘역에 대한 종래의 관념은 다소 개방되지 않았을까. 옛 경주전도를 보면 예나 이제나 마찬가지로 민가들이 고분 사이사이를 누벼 가득차 있었다.
그리고 현재의 경주박물관이 이씨 왕조 때의 관아 동헌이요, 그를 둘러싸고 읍성이 네모반듯하게 석축돼 있었다. 역시 후대의 읍성쪽에는 그런 고분이 그리 없었을는지 모르겠고, 주로 신라왕궁인 월성 가까운 황오리 황남리쪽에 더 밀집해 있었던 모양이다.
월성을 중심한 첨성대·안압지 일대가 궁성으로 된 것은 제5대 파사왕 이후의 일이다. 월성에는 본시 표공의 저택이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월성 이전의 신라초기 왕궁은 금성이었다. 그 금성의 위치는 확실치 않지만 대개 월성 서북 1㎞미만의 거리에 있었지 않나 추정되는데, 어쨌든 그 두 성이 현존 도심의 고분들과 너무도 지척간에 있었음은 확연한 사실이다. 그러면 당시 백성의 인가들은 어디에 있었을까. 적어도 왕도 안에 육촌이 있었다고 하는데 왕궁과 어떠한 거리에 배치돼 있었을까. 현재의 오릉 부근, 동천리·배반리·보문리 등등의 지역이 어리 짐작으로 지목되고 있는데 왕성 측근의 황남리 일대에 유독 큰 고분이 있는 것을 보면 능히 그럴싸한 지적이다. 금강산밑의 동천리·용강리 일대, 명활산성 밑의 보문리 일대, 선악산 밑의 서악리·충효리 일대에 각각 고분군이 산재하는 까닭이다. 그리고 20여리씩 떨어져 있긴 하나 남산너머 내남면 용장리와 서악너머 모량∼건천 사이에도 금척리·대곡리들 몇 무더기의 고분군이 있다.
그러한 고분군들은 왕궁지적의 그것들처럼 주요 촌락과 직결된 고분들이 아닐까. 가령 보문리의 경우 그 뒷산인 명활산은 성산으로 섬겼고 육촌장의 한 사람인 금산가리촌장 지타가 하늘서 내려온 곳이란 전설이 있다. 경주교외의 포정가는 길목에 있는 금강산 역시 영악으로 섬겼고 금산가리부의 금산이 곧 이 금강산이란 견해도 있다. 이 산을 중심으로 탈해 왕릉 헌덕 왕릉을 비롯해 수많은 고분들이 있으며 또 신석기시대 유물도 발견되므로 그야말로 오랜 주거의 흔적이다.
옛 주거지는 으례 하천과 구릉을 끼고 있기 마련인데, 경주의 고분군도 당시 촌락과 같이한다는 점에서 조금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모두 강을 끼고 평지가 아니면 자그마한 구릉에 비껴 자리 잡았다.
이같이 옛 경주사람들은 평지 내지 아주 나지막한 구릉에 분묘를 썼고 그 묘지가 그냥 시가지로 변해버렸다. 그들이 왜 평지 분모를 썼고 담장밖에 사자를 모시었는지는 그들의 사상과 신앙을 밝히는 주요과제가 되려니와 그보다 더 흥미있는 사실은 오늘의 경주시가의 구성이 바로 옛 관념의 잔재가 아니겠느냐는 점이다. 사실 한국인의 통상 관례에서 공동묘지는 마을로부터 외진데 있다. 그렇건만 경주사람들은 예부터 인가와 분묘를 가까이 두었고, 그래서 오늘의 경주시가가 예사롭게 고분군 속에 형성된 것이리라. 따지고 보면 이점은 경주의 매우 만연하고 보수적인 특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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