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보고 창구멍 막기|이인호<고대 부교수·서양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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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일어가 고등학교의 제2외국어로 인정을 받게 되었고 일어 독본까지 정식으로 출판되었다는 소식이 들려 온다. 무엇인지 께름칙한 기분이다. 시대 착오적인 감상일까? 아니면…? 이제 와서 일어의 실용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서울 한복판은 고사하고라도 금수강산 방방곡곡에「하오리」가 나부끼고 있는 상황 속의 현실인 바에야.
석연치 못한 심정 속에는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체념이 깃들이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왜 진작부터 일본에 관해 냉철하고 깊은 이해를 길러 오지 못했던가 하는 후회의 농도 또한 그에 못지 않게 짙은 것이 아닌지?
일본이라면 치를 떨던 이승만 박사나 그 밖의 애국 선열들의 심정을 전후에 성인이 된 우리 세대라고 이해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아니 우리 민족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하고 영원히 기억하여야 할 줄 안다.
그러나 정치란 감정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역사란 염원으로써만 이루어지는 것 또한 아니다. 자라나는 젊은 세대에게 일본에 관한 견식을 얻을 기회를 엄금하여 마치 일본은 패전과 함께 그의 역사적 존재마저도 상실한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했던 애국자 이 박사의 과오는 이러한 면에서 너무도 큰 것이 아니었는지?
이제 일본과의 교류가 불가피하게 된 이 마당에서 우리가 일본을 좀 더 객관적인 태도로 통찰하고 평가할 수 있는 안목을 기르지 못했기 때문에 현재 겪고 있고, 또 앞으로도 겪지 않을 수 없을 피해가 얼마나 큰 것인지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하지만 애국의 열의가 지나쳐 과오를 범했던 선인들을 나무라기 전에 우리가 해야 될 시급한 일은 따로 있는 것 같다. 우리들 또한 그와 같은 식의 과오를 범하여 훗날 뉘우침 거리가 될 것을 마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짐해 보는 것이다.
일본 다음으로, 아니 그 이상으로 우리가 두려워하고 미워하고 피해 본 것이 있다. 두말 할 것도 없이 공산주의라고 공산주의에 관해서는 관심을 갖는다는 자체마저도 용공 행위와 같이 취급되며「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이 어느 해에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관리들이 앉아서 공산 국가의 간행물이면 어학 사전도 통관을 불허하고 제정「러시아」문화사 독본까지도 압수하려는 것이 아직도 우리의 현실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우리가 반목을 한다 해서 공산주의가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고 이제 우리는 그들과 무력으로가 아니라 대화로 대결하지 않으면 안될 지점에 도달하고 야 만 것이다. 민족이라는 말이 그들에게 무엇을 뜻하는지 조차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인가?
호랑이보고 창구멍 막기란 그래도 호랑이를 보고 눈을 감아 버리는 수작에 비하면 훨씬 현명한 처사이다. 이제 일본 아닌, 공산주의 아닌 다른 또 어떤 모습의 호랑이가 눈앞에 나타나게 되더라도 제발 우리에게 그것을 대적할 만한 준비가 좀 더 갖추어져 있도록 하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정신을 차릴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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