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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7)휴전회담(후반부)(9)|반공포로 석방(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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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953년 6월18일 새벽 2시-. 이른 장마철에 접어든 우리 나라 남부 지방의 날씨는 가랑비가 내리는 가운데 야산과 들판에는 안개가 자욱히 끼여 지척을 분간키가 어려웠다.
이상하게도 한국 전쟁 중에는 큰일이 생길 때마다- 전쟁 자체가 큰 일이긴 하지만- 비가 내렸다. 북한이 38선을 대거 돌파, 남침하던 6월25일 새벽 4시에도, 그후3일만에 서울을 휩쓸던 6월28일 새벽에도, 그리고 대전에서 소위 제2의「엑서더스」라고 불리는 피난 소동이 벌어지던 7월1일 새벽에도 비가 왔고, 또 정말 온 세계가 깜짝 놀랄 일이 벌어진 53년 6월18일 새벽에도 역시 부슬비가 내렸다. (주=본 연재 제1, 32, 62회 참조)
아무튼 6월18일 새벽 2시에 송환 반대 한국인 포로들이 모여 있는 부산·마산·광주·논산 수용소 등은 발칵 뒤집혔다. 국군 해병들이 난사하는「카빈」소리가 한밤의 정적을 요란스럽게 진동시키며 수용소 주변의 경비용 전등들을 모조리 부셨고 북으로의 송환을 결사 반대하는 2만7천여 반공 포로들은 삼중 사사의 수용소 철조망을 뛰어넘어 그처럼 갈구하던「자유」의 품안에 안기기 시작했다.

<철조망 탈출하다 60명 죽기도>
이렇게 하여 전세계를 경악케 한 6·18 반공 포로 석방은 전격적으로 단행됐다.
이승만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원용덕 헌병 총사령관이 지휘한 이 반공 포로 석방은 완전히「유엔」군이나 공산 측의 혀를 찌른 것으로, 조인 일보 직전의 휴전 회담을 와해 위험에까지 몰고 갔으나, 결국 총성은 멎었고, 나중에 이 세기적 대 영단은 전세계적으로 높이 평가되었다. 실제로 이「석방 작전」에 있어서는 각 반공 포로 수용소에서「탈출·」을 지원하는 국군과 이를 저지하려는 미군 사이에 007수법을 그대로 재연하는 것 같은 아슬아슬한 활극이 수 없이 전개됐다. 그리고 반공 포로들의 탈출에 만전을 기하려는 우리 군·경의 치밀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철조망에 기어올라 자유의 문턱을 막 향하던 반공 청년 60여명이 저지 사격을 받고 목숨을 잃었다.
그러면 이제 당시의 반공 포로들로부터 6·18석방 때의 수용소 탈출 체험담을 들어보겠다.
▲한광호씨(당시 부산 가야 반공 포로수용소 포로·대한 반공 청년단 중앙당 비서=현 서울 거주·54) <53년 5월 중순에 김계중 헌병대장이 자기 사무실로 나오라기에 가 봤더니 국방부에서 왔다는 사복 차림의 박 중령이라는 한 중년 신사를 소개하데요.
박 중령은 나한테 반공 포로 석방을 넌지시 암시해 주면서 광주·논산 수용소의 반공 포로 대표들을 가서 만날 계획이니 그들이 모든 것을 솔직히 얘기할 수 있도록 편지를 좀 한 장씩 써 달라는 거예요.
편지를 써 주면서 한국 정부가 반공 포로들에 대한 어떤 조치를 취할 것 같은 육감이 들긴 했지만 포로 관리의 절대 권한이 미군 측에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박 중령의 석방 암시가 도저히 믿어지지 않더군요.
나는 2주일 후에 다시 오겠다는 박 중령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수용소로 들어오다가 미군 수용 소장한테 들켜 40일간의 구류 처분을 받고 또 다시 포로 영창에 들어갔어요.
변형옥 조직부 차장에게 박 중령이 오거든 만나 뵈라고 부탁하고 철창문을 들어섰는데 이튿날부터 가야 수용소 제1지부 단장 김성익 동지, 제2지부 단 비서 박응칠을 비롯 김병후 동지 등 반공 청년단 간부들이 거의 다 영창에 수감됩디다.
6월17일 낮 미군 감시 헌병의 양해를 받아 일광욕을 나갔더니 변형옥 동지가 건너편에서 오늘 저녁 밥그릇에「메모」가 들어간다는 손짓 연락을 하더군요.

<군·경 지원에 미군 극력 저지>
저녁밥 그릇에 들어온 변 동지의「메모」는『내일 새벽 1시를 기해 모종 조치가 있으니 자지 말고 대기하라』는 거였어요.
나는, 옆 감방의 김성익 동지한테 이를 연락해 준 후「타월」로 허리띠를 만들어 매고 누워 자는 척하며 기다렸어요.
12시가 넘어 깜박 잠이 들어 버렸는데 영창 앞 복도에서 미군 헌병의 비명이 나더니 권총을 소지한 사복 차림의 한사람이 2명의 국군 헌병을 지휘, 내 감방 문 자물쇠를 열게 한 후『당신이 한광호냐』고 물으며 빨리 나오라는 거예요. 나와 보니 미군 영창 감시 헌병 조장을 우리 헌병대 정보 과장 이 대위가 권총을 뒤에서 겨루고 손을 들려 끓어 앉혀 놨습디다.
이 대위는 내가 나오자 그 미군 헌병을 끌어다가 내가 있던 제5호실 감방에 구금시키라고 옆의 부하들에게 명령하데요.
나는 국군이 무슨 반란(?) 을 일으킨 것만 같아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습니다.
국군 헌병들은 갇혀 있는 반공 포로들을 간부부터 서열 순으로 차례차례 감방 문을 따고 나가게 하더군요.
정보 과장은 이 상사를 시켜 나와 김성익 동지를 안내케 합디다. 무슨 영화 장면 같은 이런「드라마」속에서 이것이 생시인지 꿈인지를 분간해 보려니까 이 상사는 오늘 암호가 「살자 투사」이니 잘 기억하고 가야산만 넘으면 사는 거니까 빨리 나가라는 거예요.
이미 수용소 이중 철조망은 끊어져 훤히 트여 있고 반공 포로 동지들도 모두 탈출했더군요. 그래도 안 믿어져 이 상사한테 이게 웬일이냐고 물었더니『하여튼 당신들을 살려 주는 일이니 빨리 산을 넘어가라』면서 되돌아섭디다.
논둑을 건너는데 총을 든 국군2명이 수하를 하길 래「살자 투사」 라고 했더니 수고한다면서 어서 산을 넘어가 헌병·경찰의 보호를 받으라고 하데요. 이 말을 듣고 나니 그제야 마음이 놓입디다.
산중턱에 오르니 먼저 탈출해 나온 강응인 제2지부 단장이 보낸 반공 청년단「보이·스카우트」대원들이 마중 나와 기다리고 있데요.
산밑 수원지로 내려가 보니 가야 수용소를 탈출한 반공 포로 동지 8백여 명이 모여있습디다.>
▲김문주씨(당시 부산수용소 반공 포로=현1급 원호 대상자·서울 거주·41) <나는 53년 6월18일 밤 부산 수용소를 탈출하다가 미 해병대의 사격을 받아 중상, 두 눈을 실명 당해 1급 원호 대상의 상이 반공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50년 8월5일 평양 철도 고교3년 재학 중 북한 공산군에 강제 징집 당했다가 그해 10월19일 북진한「유엔」군에 포로가 돼 인천∼부산 수영∼거제도∼부산 가야∼영천∼논산 포로 수용소 등으로 옮겨다니다가 53년 봄 부평 수용소로 올라왔어요.
원래가 미군 부대 작업 지원을 위해 차출됐던 부평 수용소의 1천4백여 반공 포로들은 모두 신체가 건장한 사람들이었어요.
우리 부평 수용소 반공 포로들은 6·18석방 전에도 포로 강제 송환을 반대하는「데모」를 벌이다가 미군 최루탄 공세를 받아 20여명이 다친 일이 있었지만 반공 포로 석방 당시에는 전국 수용소 중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난 비운의 수용소이기도 했지요.
정말 탈출은 문자 그대로의 사선이었고 철조망을 기어오르다 쓰러져 떨어지는 반공 포로들의 최후는 아비규환의 수라장이었습니다.

<경비용 전등 모조리 깨뜨리고>
부평 수용소는 헌병 총 사의 석방 지령이 연락되지 않아 6월18일 정오 영내「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반공 포로 석방「뉴스」를 듣고서야 술렁대기 시작, 최동성(고인) 반공 청년 단장의 지휘로 회의를 열고 이날 밤 전원 결사 탈출 할 계획을 세웠어요. 이 같은 우리 반공 포로들의 동태를 눈치 챈 미군 당국은 18일 오후의 작업은 아예 내보내지도 않더군요.
저녁때 탈출 방법을 모의하는데 국군 헌병 중위 한 명이 우리 막사 주변으로 다가와서는 경비병을 야단치는 척 하면서 큰소리를 치 길래 들어보니까 우리들한테『다른 수용소의 포로들은 다 탈출했는데 뭐하고 있느냐』는 얘기였어요.
그가 철조망 가에 서서 안절부절 못 하면서 계속 이같은「재촉」을 되풀이하는 바람에 우리들은 안심하고 밤9시를 기해 일제히 철조망을 뛰어 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부평 포로 3개 대대는 각 대대별로 50∼60명씩 조를 편성, 조별로 집단 행동토록 하는 한편 철조망 주변의 경비 등 전구를 모두 돌멩이로 깨뜨려 놓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춰 놨어요.
미군 당국은 날이 어두워지자 한국군 경비병들을 모두 철수시키고 인근 미 해병대를 대거 동원, 착 검까지 한 M-1소총에 완전 무장을 시켜 수용소 주변을 이중 삼중으로 둘러싸게 하데요.
그래도 우리들은 설마 쏘지는 않겠지 하는 생각으로 9시가 되기만 기다리고 있었어요.
9시 정각. 우리들이 5열 종대로「스크럼」을 짜고 정문을 나서 철조망에 담요를 깔고 뛰어넘으니까 미군 경비병이 도망을 치 길래 안심, 두 번째 정문을 부수려 달려들자 감시 탑에서 최루탄이 비오듯 날아오기 시작합디다. 그래도 대오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최루탄을 발길로 차내면서 밀고 나가 세 번째 철조망을 넘으려는 순간 미 해병대가 총을 가슴에 들이대며 우리들을 완전 포위하데요.
이렇게 선두의 몇 대열은 철조망을 넘어 탈출했으나 나머지 전진은 좌절돼 버리고 후미에서는 일대 혼란이 일어났어요. 이틈에서도 양찬길(고인) 동지는 총알을 맞아 가며 미 해병대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 인천 도립 병원에서 팔 하나를 잘라 내고 살아났어요.

<최루탄 맞고 실명된 포로도>
하는 수 없이 우리들은 전진 방향을 제3 인천 뒤편으로 돌려 다시 탈출을 기도, 절조 망에 막 올라붙으니까 미 헌병대의 저지 사격이 시각 됩디다. 사격과 동시에 수용소 옆 미군 「헬리콥터」장의「서치라이트」가 우리 포로들이 몰려 있는 쪽을 환히 비쳐 대낮같이 밝게 해줍디다.
이런 수라장 속에서도 후미 대열들은 빨리 나가라고 함성을 치며 앞으로 밀고 나왔어요. 중간 대열에 섰던 나는 마지막 철조망을 잡는 순간 갑자기 앞이 캄캄해지면서 두 눈이 아프고 쓰립디다. 손으로 만져 보니 양편 눈 옆 관자놀이에 구멍이 뚫려 있고 코와 입에서는 피가 콸콸 쏟아지는 거예요. 남들은 탈출하는데 나는 이제 와서 총 맞아 죽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정신이 번뜩 나며 창피한 마음이 들어 우선 수건으로 두 눈을 동여맨 후 웃저고리를 벗어 얼굴을 가리고 누워 버렸어요.
나는 그후 영등포 미군 병원과 인천 앞 바다의 병원 선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두 눈을 실명하고 만 채 53년9월 판문점 중립 지대까지 송환 됐다가 54년 1·20 반공 포로 석방 때야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주요일지> (1953년 3월9일∼12일)
※9일 ▲「유엔」 안보리, 한국 통일 부흥위원단(UNCURK) 해체요구의 소안 부결▲「밴플리트」전8군사령관, 한국전에서 원폭 사용 주장 ▲소련의「말렌코프」신 수상, 동서공존 강조
※10일 ▲저격병 능선 서 격전 계속 ▲미 하원「하와이」주 승격 안 가결
※11일 ▲「유엔」총회, 한국 재건 지지 안 가결 ▲영 에 관계 긴장
※12일 ▲미 하원 군사위, 한국에서의 탄약 부족 문제에 관한 조사 안 가결▲「베를린」상공서 영기 1대 소기에 의해 격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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