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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 있어서 종교의 의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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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재단법인 선학원은 18일 하오 중창기념「세미나」로 「한국종교의 공헌과 사명」을 주제로 한 모임을 시작했다.
「한국에 기여한 종교」를 제목으로 한 이날의 대화를 계기로 5월18일과 6월15일의 모임이 계속될 것인데 첫날엔 김철준 교수(서울대 문리대·국사)의 「한국사에 있어서 종교의 의의」란 강연과 이재창 교수(동국대)의 「불교의 기여」, 최창규 교수(서울대 문리대)의 「유교의 기여」, 이원순 교수(서울대 사대)의 「천주교의 기여」, 민경배 교수(연세대)의 「신교의 기여」 등 발제강연이 있었다. 다음은 김철준 교수의 강연내용이다.
종교가 한 사회에 자리잡을 때는 먼저 문화이론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새로운 종교는 이미 자리잡고 있는 앞선 종교의 문화이론과 충돌하게 마련이며, 이 과정을 거쳐 자리잡기 위해서는 그 사회 지배층과 타협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 종교는 타락하는 것이 역사에 나타난 양상이다. 대중을 잊고 특수층과 연결을 갖고 마침내는 멸망하는 예를 세계사에서 흔히 보는 것이다.
고대부터 중세·현대에 걸쳐 그때마다 정신지도이념으로서 종교가 등장했다. 한국의 종교도 한말에 이르기까지 문화의 폭을 넓혀왔다.
그것은 1910년 국토 상실의 시기까지 지속됐으며 이후엔 문화의 폭이 좁아졌다. 해방과 함께 축소된 우리문화의 폭을 다시 넓히고자 하는 노력이 기대되는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 문화의 폭을 넓혀 온 종교에 불교가 있다. 처음 불교가 한국에 들어왔을 때도 전통적 신앙과의 충돌을 피할 수는 없었다. 청동기시대 이후 원시신앙형태가 제정분리의 과정을 거칠 때 부족국가들은 그들의 시조설화만으로 부족을 느끼게 됐다. 그래서 밀려온 것이 불교였다.
불교는 인도·서역·중국을 거쳐 들어오면서 이들 각 지역의 문화요소를 아울러 가져왔다. 이들 문화의 도입과정은 따라서 불교 교리 면에서의 독특한 새 방향을 제시한 것이었다.
신라의 법흥왕에서 진덕여왕 시대엔 국가적으로 불교가 성했으며, 불교적 인명의 예를 많이 들 수 있었다. 국민의 단결을 위한 이념으로서 불교는 큰 역할을 다했던 것이다.
불교는 생명 있는 호흡을 하기 위해 전통적인 신앙정신과 연결을 가지려 했다. 원광의 세속오계는 바로 그것이다. 유불 겸통한 원광이 가르친 사군이충, 사친이효, 교우유신, 임전무퇴, 살생유택은 그러나 중국의 5륜과 연결해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장유유서나 부부유별과 같은 것이 없고 순서를 바꾼 것은 가치체계의 다름을 입증하는 것이다.
특히 교우유신은 임신서기 우에서도 드러나 있듯이 당시의 동료의식 강조정신을 엿보여주는 것이다. 미개사회에서부터 계속되는 연령집단의 가치를 강조한 것이다. 임전무퇴와 살생유택도 그렇게 볼 수 있다.
전통과 불교가 결합해서 지배자뿐 아니라 서민도 포용할 수 있었던 것, 그리하여 문화적 저변확대가 가능했던 것이 불교의 확대를 가능케 한 것이다.
원효는 그 점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겼으며 후진국가에서의 철학사상의 일반적 보급에 공헌했다.
그런 전통 속에서 선교의 대립을 극복한 천태종은 중세사회로의 발전을 인도했고, 전체적인 사회문화 발전을 촉진했다.
대장경의 간행은 바로 전체적인 학문적 수준이었음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 말에 들어 불교가 지배권력에 영합하고 자체의 부패가 심각해지자 이에 반기를 들고 나온 것이 유교였다.
그러나 유교도 정교분리의 주장을 가지고 출발했으나 이것이 치자계급의 이념으로 되고 정도전의 민본주의를 낳았지만 뒤에 지방지주계급과 결탁되자 보수적 경향이 짙어져 율곡 같은 이의 비판을 받게된다.
조선후기의 실학이 고민했던 것, 양명학의 실천이 막혔던 것 같은 한국유교의 한계는 중국 대륙적인 테두리가 반도 안에서 잘 적용되지 못하고 전통을 고수하는 서민기반에 소외된 데서 불가피했던 것이다. 유교는 마침내 공리공론의 형식주의로 고착, 폐쇄성을 면치 못했다.
이런 때 남인학자들 사이에 천주교가 들어왔으며, 때문에 초기엔 한국체질적 수용이 가능했다.
그러나 뒤에 외국선교사들이 가져온 천주교는 변질된 것, 저질적인 것이 됐다.
신교의 도입은 문화전반의 계층별로 각기 다른 욕구를 만족시키면서 이뤄졌으나 당시 기독교 수용에서 크게 기대를 건 발판으로 성장하게되는 데는 독립운동이라는 민족적 욕구 때문이었던 것 같다.
국권상실의 시대에 한용운의 「불교유신론」이 나오고 박은식의 「유교개혁론」이 나온 것은 그런 정신을 설명한다.
그러면 해방 후 우리 종교들은 과연 정신세계를 이끌 역량을 가졌다고 볼 수 있는가?
언제나 자유와 평화는 피와 땀의 대가로 얻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얼마 전 일인들의 속죄의 돈으로 3·1 운동 때 불태워 없어진 수원 제암리 교회를 신축한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의 귀중한 역사적 경험을 과연 팔아버릴 수 있는 것인가?
역사적 경험은 그것을 살려가며 발전해가야 하는 것이다. 평양 신사사건의 정신이 한국교회에 계속된다면 과연 오늘날 일본계 기독교가, 종교가 한국에 들어올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각 종파는 오늘의 시점에서 자기 종교에 대한 연구를 보다 학문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서만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는 종교로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공종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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