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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믿음] 시간과 신앙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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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4호 27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포로수용소에 갇혔던 유대인 포로들은 매일의 소망이 있었습니다. 올 연말에는 가족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입니다. 이 소망으로 그들은 날마다의 고난들을 이겨 나갔습니다. 그 소망이 없었더라면 죽음의 환경에서 하루도 못 견뎠을 것입니다. 물론 연말이 되어도 가족을 만나지 못하면 순식간에 살아갈 용기와 의미를 잃게 된다고 합니다. 소망은 생명이 살아가는 힘입니다.

유대인에게는 다른 민족에게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역사관이 있습니다. 그 역사관이 숱한 고난을 이기고 오늘의 유대인이 있도록 한 원동력입니다. 유대인들의 역사관에 따르면 역사는 단지 흘러가는 것이거나 자연질서에 따라 반복되는 것이 아니며 우연에 따라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역사는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이끄시고, 역사를 통해 일하시며, 그의 뜻을 이뤄 나가십니다. 역사에는 거룩한 뜻과 목적이 담겨 있습니다. 이들의 하나님은 철저히 역사의 하나님이며, 역사는 그분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이 땅의 역사를 어떻게 이끄셨고, 어떻게 거룩한 목적을 이루셨으며, 앞으로도 어떻게 이루실까를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은 한 해의 시작을 3월 말이나 4월 초로 잡습니다. 조상들이 애급에서 종으로 살다가 모세의 인도로 풀려난 날입니다. 이 절기를 한 해의 시작으로 삼는 것은 이제 우리는 애급 사람과 같이 태양을 따라 살아가는 반복적인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따라 살아가는 새로운 역사관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이미 시작된 구원이 광야를 거쳐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여정의 삶이라는 뜻입니다. 삶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으며 의미가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관은 삶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옵니다. 먼저 구원의 역사관은 현실에 깊이 참여토록 합니다. 현실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곳이며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는 곳입니다. 결코 외면해서도 안 되며 떠나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깊이 참여하면서 내게 주어진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아울러 현재의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갖도록 합니다. 고난 또한 저절로 생겨난 것이거나 의미 없는 것들이 아닙니다.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성숙과 새로운 소망으로 이끌어주는 디딤돌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미래에 대한 소망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역사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승리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강한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도, 삶에 대한 강한 사명감을 갖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역사를 알 때 우리는 우리의 삶이 사명이란 것을 깨닫습니다. 나의 삶은 나 개인의 삶이 아니라 역사를 이어가는 삶이며, 그 삶은 민족의 근본이 되게 한 사명을 감당하는 삶이란 뜻입니다. 이 사명은 우리의 삶을 이기적 욕심을 넘어 고귀한 삶이 되게 합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어떤 역사관을 선택하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인으로서 바른 역사관을 갖는 것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거룩한 헌신이고, 이를 통해 내게 주어진 삶의 사명을 감당하며 나아가 사회를 소망으로 이끄는 일입니다. 지금처럼 현재의 축복에 머물러 있거나 내 교회만 잘되면 된다는 식의 신앙은 우리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를 어렵게 할 것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는 이때 다시금 우리들을 품고 있는 역사의 흐름을 확인하며 세상을 향한 헌신, 내게 주어진 사명, 그리고 새로운 한 해를 소망으로 기다리는 자세를 갖기를 기도합니다.



박원호 장신대 교수와 미국 디트로이트 한인 연합장로교회 담임목사 등을 지냈다. 현재 ‘건물 없는 교회’로 유명한 주님의 교회 담임목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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