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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적 통해서 박 만나러 상경했으나 라이벌파인 이정윤 아지트로 안내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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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죽창훈련을 받으러 가는 틈을 타 도망칠 기회만 느리다 해방이 됐다는 소리를 듣고 나는 한동안 멍했다. 그러나 기뻐할 수 만은 없었다. 복잡한 심정으로 밤 늦게 동네에 돌아와보니 동네의 면서기들이 해방이 됐다고 술을 먹고 노래를 불러 떠들썩 했다. 낮까지만 해도 일제의 관리로 복무하던 자들이 마치 자기들이 해방을 전취한 것처럼 떠들어대는데 이때까지 독립운동을 해오던 나는 술 한잔 마실 생각도 나지않아 집으로 바로 돌아갔다. 그날 밤은 심정이 하도 착잡하여 잠을 한 잠도 이루지 못했다.
새벽이 되니 동네 청년들이 모두 우리집으로 찾아 들었다.나는 이때 아버지의 웃는 얼굴을 처음으로 보았다. 이 때가 내가 아들로 태어나서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한 단 한번의 기회였다. 나는 너무나 불효한 자식이었다.어머니는 나의 손목을 잡고 『이제는 네가 원하던 독립이 되었으니 제발 집에서 나하고 같이 살아보자. 내가 살면 몇 해를 더 살겠느냐』고 애원했다.
내가 막내이기 때문에 어머니는 벌써 백발이 성성한 7O에 가까운 노인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말씀을 징면으로 반대할 수 없어 『오늘 낮에는 모처럼 냇물에 라도 나가서 낚시질이라도 하면서 좀 생각해 보겠소』하고는 집을 나섰다. 해방이 되어도 나는 부모를 또 속이고 진주로 향해 80리 길을 걸었다.
진주에 가서 이우적을 찾았다. 그는 6·10 만세사건이후 공산당 학생조직의 경북책을 맡기로 하고 전북 노동조 지역 의회사건에 관련 하기도한 사람이다.1947년 이후에 월북한 후 정치 보의부에서 활약했으나 그 뒤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가 1943년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전향하여 출옥할 때 서울에서 만난 이후로부터 나는 늘 그와 접촉을 가지고 있었다.나는 내가 조직하는 지하조직의 고문으로 그를 맞으려고 제의한일이 있었으나 그는 겁을 내어 조직을 갖는 것은 바쁘지 않으니 다만 종종 만나서 정보 교환만 하자는 것이었다.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나보다 3세나 위인데도 나에 대해서는 정중히 대하였다.
나는 진주에서 여러 동지들과 팔월회라는 단체를 조직해놓고 이우적과 같이 서울로 올라갔다.
나의 마음속에는 국내에서 가장 꾸준하게 투쟁을 계속한 박혜영에 대한 생각이 늘 있었다.
나는 서울에 가면 곧 박혜영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때 서울 종로 네거리의 화신백화점 벽에는 『박혜영 선생 나오라』 는 「비라」 가 나붙어 있었다.
그러나 이우적이 나를 데려가 소개한 굿은 박혜영 파와 파벌투쟁이 가장 심하던 이정구의 아지트 였다. 당시 각 파벌의「아지트」로는 명륜동 김해균의 집에 있던 박 정영의 「아지르」,그리고 이 정윤「아지트」,강진 아지트,서 중석 「아지트」등이 있었다. 나도 위남에 있는 나의 「클럽] 을 다 데리고 올라 왔으면 서울에 독립 「아지트」하나를 장만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되었으나 나는 신인이고 경찰에 한번도 잡힌 일이 없어 그들과 어깨를 겨를수는 없었다.
운동경력에 있어서는 경찰에 체포되어 신문에도 크게 나고 또 증거자료로서 경찰의 취조초서가 있어야 남이 알아주자,그렇지 않으면 여간 근 조직이 아니고는 알아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사정으로 나는 .이우적의 소개로 이정윤의 아지트에 출입하게 되었다.
이정윤은 서울 청년회의 원로로 그도 역시 1947년께 월북 했으나 아마 숙청되고 말았을 것이다.
나는 이때까지 어떠한 기성조직에도 돌지 않고 내자신의 힘으로 일해왔다.내가 이우적의 관계로 이정윤의 아지트에 출입하게 되었지만 이정윤의 조직에 들 생각은 없었다.
이정윤의 아지트 에는 해방직후 총독부 경무국 자료실에서 가져온 조선 공산주의 운동에 관한 자료가 있었다.나는 일제 때 공산주의 운동을 알아보기 위해 자료를 들춰보았다.거기엔 박혜영이 해방 전에 쓴 「탁블로이드」신문·책자 등이 젖가슴 높이까지 쌓여있었으니 1m쯤은 돼보였다.그 가운데 지금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해방자와 The communication라는 정기 간행물이다.경무국에서 진리를 하기위해 만든 듯한 목록이 붙어 있었는데 전부가 박혜영이 쓴 것이었다.
며칠 후에 박찬영의 「아지트」에서 그 박환영 논저의 자료를 달라고 두 사람의 사자가 왔었다. 그 중 한 사람은 김전빈 이었고 김마빈은 내가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에 다닐 때 전문부에 다니다가 김덕연에 의해 경성「콤·그룹」에 포섭된 자 이다. 그는 제주도 출신으로 일본대학에 가서 노동을 하다가 늦게야 「와세다」대학 전문부에 들어갔는데 성질이 과격했었다.
그는 노동자 출신이라고 하여「모스쿠바」의 소련최고 당 학교에 2년간 유학한 뒤 6·25 동란 때 서울에 돌아와서 서울시 당위원장을 했다.북으로 쫓겨 가서는 「게릴라」를 훈련하는 금강학원의 원장으로 있다가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그 때 김일성 당국은 박우영이 김일성정권을 전복하고 비밀리 자기내각을 조직했다고 뒤집어 씌웠는데 그 박환영내각의 민족보위상 (국방상) 에 김응빈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김응빈은 입원중 박혜영이 체포되었다는 정보를 듣고 병원을 탈출하여 서울을 향해 산속을 달렸다.북한 군경당국은 군견까지 풀어서 남쪽으로 통하는 모든 산을 수색했다.남을 반대 하여 간 김응빈이 다시 한번 살아보려고 남을 향하여 사력을 다해 뛰었으나 그는 결국 죽고 말았다. 월북한 남노당원의 말로는 모두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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