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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만에 밝혀진 대구 시립박물관 문화재 도난|"국보급 포함 천여 점이 없어졌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6·25 직후 어수선한 톰을 타 대구에서 1천여 점의 중요화재가 도둑맞았던 이른바 「대구시립박물관소장 문화재도난사건이 20여 년만에 끈질기게 파고든 고 미술가 송원 이영효씨(60·서울용산구동부이촌동)의 추적으로 폭로됐다. 이 같은 사실은 이씨가 문화재잡지 월간문화재 4월 호에 폭로한데서 뒤늦게 드러나, 앞으로 이 사건은 소유권을 둘러싸고 법정싸움이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이씨의 주장에 따르면 그때 도난 된 중요문화재는 현재 각 대학박뭍관이나 개인소장가들의 손에 들어가 있고, 더구나 일부는 일본에까지 밀 반출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씨는 이를 폭로하기 앞서『범죄의 시효는 지났다. 그러나 이 사실을 밝히고자하는 의도는 처벌을 바라서가 아니요, 귀한 문화재를 아끼는 반성과 전진을 위한 것이며…태만과 무지와 배신으로 얽혀진 이 사건에 대하여 결코 용서할순 없다』고 전제, 당국의 조처와 늦게나마 해결책을 호소했다.
당시 대구박물관은 해방직후 대구에 샅던 일인들의 소장 문화재 2천여 점을 헌납 받아 1946년에 발족했었다. 대구박물관은 6·25동란으로 문을 닫고 있다가 57년에 폐쇄 돼버렸다.
그때까지 남아있던 소장품 중 일부 1천3백12점만은 경북대에 위탁 관리시켜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유물을 이관하기 전에 당초의 소장유물대장이 감쪽같이 종적을 감추었으며 일인들의 기증내역서도 일체 없어져버려 그 무렵에 이미 소장품 도난사건이 말썽 났었다.
그런데 이 도난사건은 박물관 관계자와 골동상을 통하여 소장품이 민간에 흘러나옴으로써 구체적으로 표출됐다고 이씨는 주장했다.
이 같은 주장은 당초 대장엔 『2천 점이 훨씬 넘었다』는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른 것. 이관당시 도난 되었던 소장품 중에는 국보급도 많았었는데 현재 국내의 모 대학박물관과 개인소장가에 흩어져 있음이 확인될 뿐더러 일본에까지 유출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씨가 이 사건을 추적하기 위해 중인으로서 접촉해 협조를 얻은 관계자는 김재숭(전 골동상·강화·농원경영) 곽명원(전골동상·대구·공신만물사대표) 소주영 (대구·정신과의) 장계환(대구·골동상·삼국당) 선우인순(서울·고미술 수장가) 이공일(경북대박물관) 권순녹 (대구·사진업) 제씨 및 대구시청. 이씨는 이들 증인을 통해 사건전모를 규명한 것이다, 이같이 시립박물관 소장품이 도난·유출 됐다는 증거로서 이씨는 (1)대구박몰관은 동란 중 전화를 전혀 입지 않았음에도 목록대장과 헌납서 등 관계문서가 일체 없어져 버렸고 (2)헌납자인 일본인 백곤수길과 삼교형의 소장품 도둑이 있는데 그 중에 지금 흩어져 있는 국보급의 동경과 불상과 도자기 등이 포함돼 있으며 (3)동란직후 대구박물관유물창고의 열쇠를 가지고 있던 이 박물관 이사 고 최일문씨의 소실이 단원풍속도·현제 산수화첩·대원군묵난병 등 서화 수백 점을 매각한일이 있으며 (4)당시 대구시장 허흡씨가 문제의 퇴계서병풍과 청자 등을 집에 간직하고 있으면서 팔려고 내놓은 일이 있으며 (5)당시 장물아비로 알려졌던 공신만물상 곽명원씨에게서 청자상약국명합·청동불상 등 40여 점을 사왔던 서울의 골동상이 있으며 (6)서울의 골동상이던 고 장봉문씨가 분청박지모란문 과자기·청자포도당아문주자 등 적잖은 대구박물관 소장품을 거래했다는 사실 등을 지적하고있다.
대구시립박물관 소장품 중 특히 유명한 유물은 분청사기 상감운화문편일 마지은니수릉엄경권십 금동보샅반가상 악낭동경 청자음각운룡문상약국명합 청자철채포도당아문주자 이퇴계서병풍 등 허다했다.
그중 분청사기편호와 마지은니경은 현재 보물 268및 271호로 지정돼 경북대에 수장돼 있고 퇴계화병뭉 역시 경북대에 있다.
그러나 악낭동경 수종은 숭전대박물관에 들어갔고, 청자상약국명합은 H씨의 소장품이 됐고, 청자포도당아문주자는 H씨의「컬렉션」에 들어가 있으며 삼국시대 금동불은 바다건너 일본에 유출돼 가 있음이 밝혀진 것이다.
대구에는 일제때 소창무지조(남전사장) 등 60여명의 문화재수집가가 있어 이들이 해방과 합께 대구시에 기증했다. 그중 미미한 소장가였던 사권국지포의 헌납서가 유일하게 남아 있는데 ▲불상=약50점 ▲서화=약1백점 ▲미숨품=수십 점으로 돼있다. 이에 비하여 다른 여러 헌납품을 통틀어서 경북대에 이관한 품목은 현격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1)유물=9백36점 (2)서화=14점 (3)드서=1백1점 ⑷참고품 2백61점으로 계1천3백12점이다.
즉 서화만 하더라도 불과 14점밖에 남지 않고 적어도 수백 점이 도난 됐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대구시립박물관은 이들 2천 여점의 헌납품을 가지고 45년11윌21일에 발족, 시민의 모금에 의하여 47년5월 달성공원에 박물관청사까지 건립, 개관했었다.
그러나 이의 운영은 시청 성인교육계에서 관할하고 서기2명과 수위1명에게 열쇠를 맡기다 시피 했었다.
그리고 50년 동란이 발발하자 휴관한 이래 유물을 모두 이 박물관 창고에 집어넣은 채 몇 사람의 손으로 그 열쇠가 옮겨다니는 동안 좋은 물건들이 창고에서 속속 빠져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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