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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3·1운동」기술 길다고 삭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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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가영교수의 『신일본사』는 지난l952년이래 문부성검정에서 4차의 불합격과 5차의 조건부 (수정)합격, 그리고 합격은 단한번뿐이라는 형극의 길을 걸어왔다.
그래서 지난65년에「불합격처분으로 인한 손해의 국가배상청구소송」, 작년에는 「검정처분 취소청구소송」을 제기, 앞의 것이 지재, 뒤의 것이 일심서 원고가 승소, 문부성공소로 고재에 각각계류중이다.
이 「교료서재제」는 「학문 사상 표현의 자유」논쟁으로 발전, 각계가 원고를 지지하고 나섬으로써 일본조야에 큰파문을 던져왔던 것이다. 불합격내지 수정처분의 대상이된 부분은 거의 1천개항목에 달하는데 이 가운데 한국과 관련이 있는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서는 「기기」에 관한 것을들수있다.
원래 『신일본사』에서는 『「고사기」나 「일본서기」는 신대얘기부터 시작된다. 이신식대얘기는 물론 신무천황이후 최초의 천황수대에 이르는 기간의 기사는 모두 황실이 일본을 통일한후 황실의 일본통치를 정당화하기위해 구상된 것이다』라고 돼있었으나 문부성은 「신대」이후 부분의 전문삭제조건을 붙임으로써 현행본에는 이부분이 삭제돼있다. 이를테면 가영교수는「황국사관」에 대한 근원적 도전을 시도했으나 좌절된 것이다. 「만세사건」부분에서는 『사건후 지금까지 무관이었던 총독이 문관으로 바꾸어지는등 통치정책의 수정이 단행됐으나 독립운동은 그후에도 엄격한 단속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계속됐다』『주①경성에서는 수천명의 민중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일어섰으며 이것이 조선전토에 번져 약 반년간 계속 됐다. 여기에는 약1백만의 남녀가 참가했으나 다수의 희생자를 냈다』는 기술부분이 지나치게 길다는 이유로 삭제됐다.
또「현대사」부분에서 『전후의 새 역사교과서는 전전의 극단적 국가주의사상이나 비과학적 요소를 제거하는데 주력…』으로 썼으나 「전전」이후 부분을 『전전의 편집방침을 근본적으로 개혁…』이라고 수정토록 지시했다.
뿐만아니라 문부성의 이렇듯 적극적인 수정지시 때문에 위축된 역사 교과서 필자들은 검정의 관문을 통과키위해 아예 처음부터 자기소신과는 달리 「황국사관」적인 기술로 시종하거나 문제될 부분의 기술을 피하는 소극적인 부작용도 가져왔다.
그렇기때문에 비교적 사실에 충실하려는 가영교수의 『신일본사』에서도 「황국사관」의흔적은 허다하게 남아있으며 당연히 다루어져야할 한국관계기술을 회피한 흔적도 역력하게 나타나있다. 예컨대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침략」을 「출병」으로 표현하고 관동대예재당시의 한국인학살사건이 묵살되는가하면 고송총벽화사진이 신판에 「칼라」로 수록됐음에도 불구하고 이에대한 기술은 전혀없다.
가영교수 자신도 이러한 문젯점들을 인정하면서 검정은 해마다 있으며 검정자세 역시 강경·온건의 두갈래 방침이 엇바뀌어 적용되고 있기 때문에 고충이 크다고 말하고있다.
작가 송본준장씨도 그의 「교과서비판」에서 이러한 일본역사교과서 일반의 왜곡된 부분으로서 다음 몇가지를 지적하고 있다.
ⓛ일본에 미친 한반도의 영향이 갖는 비중으로 봐서 한국관계기술이 지나치게 적다.
②그나마 한국은 단순한 중국문화의 중립지내지 일본이 「출병」한 지역으로서만 묘사돼있다.
③선진한국이 일본에 미친 문화적 영향은 대화시대의 「귀화인」부분에 약간 언급돼있으나 이것도 「귀화인」이라는 「복종·종단된 사람들」내지는 「기술자」라는 틀안에 축소해서 표현하고 있다.
④대화 조정이 『백제와 제휴』, 고구려와 싸웠다고 해야할 부분이 『백제를 거느리고」로 돼있으며 『싸웠다』고만 할뿐 「패전사실」은 짐짓이를 흐리고 있다.
요컨대 ⓛ한국문화는 「야요이」(미생) 초기부터 일본의 문화·사회제도에 영향을 미쳤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는 일본의 문화·사회제도가 한국문화를 바탕으로 형성됐음을 좀더 강조할 필요가 있으며②일본의 고대국가를 형성한 대화의 호족(천황가의 선조도 이가운데하나) 이 한국계임은 이미 학계의 정설로 돼있는이상 단순히 『중국의 청동기와 철기가 조선에서 일본으로 들어왔다』는 부실한 기술을 수정, 인간이동이 병행됐음을 밝혀야하고 ③조작된「기기」의 기술을 그대로 인용함으로써 학생들의 고대사관을 오도하고 있는 점도 전반적으로 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일본의 문부성 관료, 그뒤에 있는 「황국사관」에 오염된 권력계층등, 그리고 「황국사관」의 「틀」에 고집스럽게 집착하고 있는 역사학계의 원로급 중진들이 남아있는 한 일본역사교과서의 한·일관계가 하루아침에 올바르게 기술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가영교수와 같은 양식있는 집필자의 단계적인, 그러나 집요한 노력에 의해 하나하나 고쳐지기를 기대할수밖에 없다. 다만 고송총벽화발견 이후 오히려 일본국민 일반이 고대 한·일관계의 「진상」을 「스무드」하게 받아들여가고 있는 경향은 극히 고무적인 징후라고 할수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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