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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8)전시의 문화인들(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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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작가들이 종군 작품을 쓰는 외에 벌인 두드러진 활동으로는 종군보고 강연회와 기관지 발간 및 문인 연극을 들 수 있다.
종군보고 강연회는 작가단이 발족된 후 얼마 있다가 51년8월14일에 대구 문화극장에서 처음으로 열렸다.
강연 내용은 일선 장병들이 싸우고 있는 모습을 전하는 것은 물론 신문이나 기타 잡지에 소개되지 않았던 생생한 무용담과 미담을 여러 연사들이 열변하는 것으로 붓 아닌 입을 통한 이런 전달 방식은 청중들에게 색다른 감명과 흥미를 주었다.
첫 강연에는, 정비석 박영노 장덕조씨가 연사로 나왔고 양명문 조지훈(고) 이덕진씨의 시 낭독과 최정희씨의 소설낭독이 있었다.
이 강연에서 좋은 성과를 얻자 9월20일에는 아직 완전 수복되지 않은 서울 중앙극장에서 김영수 윤자종 박영노 최태응씨 등이 일선 종군 내용을 강연했다.
51년12월6일에는 대구 문화극장에서 시내 중·고교생들을 대상으로 세 번째의 보고 강연을 가졌는데 이때는 육군 군악대의 연주와 군가 진급단이 출연하여 더 흥을 돋우었다.

<문화인 시국 강연회 대성황>
뒤이어 12월14일에는 문총 경북지부의 후원으로 문화인 시국 강연회를 열어 종군 보고에만 그치지 않고 문화 강연도 곁들여 연3일간 대성황을 이루었다.
이 같은 종군보고 강연회는 52년8월엔 광복절 기념 행사로 서울·대구·부산에서는 물론 광주·전주 등 지방도시에서도 열려 전후 10회에 달하였다.
그밖에「육군종군 작가단」의 주요활동으로는 기관지 발간을 빼 놓을 수 없었다.(주=문인극에 관한 내용은 다음에 다루겠다)
기관지의 발간문제는 피난시절 출판물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작가들의 종군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넓히기 위한 의도가 작용되었으나 피난살이의 어려움 속에서 별도의 예산을 확보한 후 착수한 사업도 아니고 보면 이 기관지 발행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월간으로 발행할 계획을 세웠던 기관지『전선문학』을 20개월 동안 7권밖에 발행하지 못한 것도 이 같은 이유였다고 볼 수 있다.
관계자들의 증언으로는『전선문학』은 육군 공훈감실에서 인쇄에 필요한 양보다 많은 종이를 얻어다 인쇄비 대신 종이를 주어 책을 만들었고 작가들에게는 원고료조차도 지불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작가들은 많은 글을 썼다는 것이다.
육군 종군 작가 단장이었던 최상덕씨(고)의 『전선문학』창간호를 보면 이 무렵의 작가단 심정이 잘 대변돼있다.
『…이 세대에 생을 타고나서 불행한 조국과 고민하는 겨레로부터 이제 생사의 간두에서 우리들의 유일무이 무기인 철필을 들고 포연탄우 속에 우뚝 선 것이다. 돌격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뜻은 순국열사들의 그것을 그대로 계승할 것이며 행동은 하여 개탄하지 않고 입하여 규호하는 것이 아니다.
진실로 폭탄을 안고 적의 참호깊이 몰입하여 자폭하는 용사의 그것이며 수만호 고공에서 섬광 속에 침략해오는 적과 더불어 사생을 일결하는「제트」기의 용사의 그것이 아니면 아니 되는 것이다.

<전쟁 중 최초의 순 문예지로>
이 뜻이 행동이외에 우리에게는 또 한가지 중대한 임무가 있음을 자각하느니 그것은 전선과 후방을 연결하여 촌호의 괴리도 허락하지 않는 견결한 유대로서의 연락병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일선 장병의 사기를 헌묘케 하고 총후 국민의 전의를 앙양케 하는 특수임무가 바로 이것이다.』 한편『전선문학』창간호의 편집후기에도 창간 준비과정의 어려움과 자중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전무의 예산으로 기관지를 발행하겠다는 계획부터가 무모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작년(51년)10월부터 발간을 준비한 것이 52년2월 중순께야 겨우 조판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로 보아『전선문학』이 얼마나 난산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황준성 김현송 노준석 3씨의 후원으로 마침내 발간하게된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
『전선문학』은 종군 작가단의 기관지인 동시에 전쟁 문화인 전체에게 제공된 문학지이다. 전쟁과 문학의 거리를 단축시키기 위해 또 진실의 대변자로 자처하는 문학인이 전쟁을 도외시할 수 없는 생리적 욕구가 이 잡지를 낳게 했는지 모른다.』 한편 작가단의 부단장으로『전선문학』주간을 말았던 김팔봉씨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작가단의 기관지 『전선문학』은 작가단의 규모가 커지면 발간하자는 의견이 나와 약6개월 동안 준비과정을 거쳐 52년4월에 가서야 창간호를 냈읍니다. 이것은 전쟁 중에 발간된 최초의 순 문예지라고 할 수 있어요. 당초에는 월간으로 매월 발행할 계획으로 추진했으나 피난 시절이라 예산이나 그 밖의 사정이 여의치 못해 발간하지 못하고 예산과 원고 등 허락되는 대로 만들어 냈어요. 한 1년반 모두 7권을 만들고 중단된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일선 장병 위문용으로 만들었으나 순 문학지였던 때문에 일반 독자들이 많았어요.
시판용은 상당한 인기가 있었으니까요.
책을 만들 때는 미군 원조물자로 들여온 종이를 육군 정훈감실에서 한꺼번에 수십장씩 얻어다가 인쇄비 대신 이 종이를 주고 인쇄했읍니다. 물론 종이도 귀할 때지만 현금이 없으니까 종이 값은 물론 인쇄·제본비등의 경비를 모두 이 종이로 대치해서 실제 인쇄에 필요한 양보다 훨씬 많은 종이를 갖다주고 책을 만든 것입니다. 또한 작품을 쓴 작가들에게는 원고료조차 지불하지 못했습니다. 원고료를 지불할 예산이 없었기 때문이죠.

<미군 종이 안 나와 7권째 중단>
그런데도 그때의 종군 작가들은 많은 글을 써서 발표했습니다.
『전선문학』은 일부가 시판되긴 했어도 당초의 발간 목적이 시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선 장병위문에 있었기 때문에 한꺼번에 약 3천부정도 찍어서 정훈감실(당시 정훈감은 박영준 대령)에 보내면 감실에서는 이를 각 사단에 보내곤 했어요.
작가 단원들은 거의 대부분 많은 글을 썼지만 특히 박영선씨와 구상씨가 많이 썼고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육당 최남선씨의 한문이 많이 섞인「독립선언문」을 한글로 평역해서 발표한 것입니다. 평역은 중학교 1학년 학생이면 읽어서 그 뜻을 알 수 있도록 순 우리말로 쉽게 풀어놓은 것입니다. 평역작업은 박영노 정비석씨와 내가 맡아서 했읍니다.
7권까지 발행한 후 앞서 말한 미군의 종이가 나오지 않는 바람에 더 이상 발간하지 못한 채 흐지부지 되고 말았어요.
공군 문인단에서도 기관지『창공』을 발간했는데『창공』은 2호로서 중단됐고 해군 작가단에서는 만들지도 못했어요.>
▲하동종씨(현 공주사대 전임강사·44) <나는 잡지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어 육군 종군 작가단에서 발행한 기관지『전선문학』을 지금도 모두 지니고 있어요.
『전선문학』은 피난시절 작가들이 군 기관에 의존하여 발행했으면서도 순 문예지의 성격을 잃지 않았던 것이 특징이랄 수 있읍니다. 창간호가 52년4월10일에 발행되었으니 작가단이 결성 된지 거의 1년 후에야 기관지를 만든 셈입니다. 이 책은 53년12월 7호 발간을 끝으로 중단되었으니 20개월 동안 7권밖에 발행하지 못했지만 피난시절의 작가들의 활동 중에는 가장 두드러진 것이 아닌가 합니다.
물론 공군 문인단에서도 기관지를 냈지만 2호에 그쳤고 내용도『전선문학』만큼 다채롭지가 못했습니다.
또한『전선문학』이 발간될 무렵 대구에서는 서울에서 발행되던『문예』가 전시판이라는 이름으로 나왔고 또 순 문학지인『죽순』이 창간호를 냈고 그밖에 종합지로는『신천지』『신 태양』『희망』등이 발간되었으나「전선문학」은 내용에서 볼 때 이들 잡지에 비해 손색없는 문학지였고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지금의 종합지 보다 앞선 감도 없지 않아요.

<희곡「중부전선」 대민공연도>
물론 책의 제본이나 편집·인쇄·색도, 그밖에 지질은 지금보다 훨씬 뒤떨어지는 것입니다만- >
▲김송씨(당시 문총 구국대총무·현 작가·63) <대전이 적 수중에 들어가고 낙동강 전선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될 즈음 우리 문총 구국 대원들은 부산에서 부산 문화인들과 합류, 내가 쓴 희곡「중부전선」을 이해랑씨 연출로 공연했어요.
민족 정기 앙양을 목적으로 한 이 대민 공연에는 당시 부산 민사 계엄부의 후원을 받아 김동명, 유치환씨 등 50여명의 문화인들이 참가했었습니다.
그러니까 문총 구국대는 문인 종군의 효시였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나는 인천 상륙 작전 때는 종군 문화인 완장을 두르고 박성환 기자(고)·조영암씨 등과 함께 군함을 타고 한국 해병대에 종군, 「해병과 함께」라는 종군기를 서울 신문에 20여회에 걸쳐 연재했읍니다.
서울 입성 후에는 국회의사당 자리에서 3개월간의 적 치하에 신음하던 재경 문학인들과 함께 문화인 총 궐기대회를 열었구요.>
◆주요일지(1953년1월1일∼4일)
※1일 ▲「유엔」군, 맹렬한 포격으로 새해맞이 ▲이 대통령, 남북 통일을 강조하는 신년사 발표 ▲「유고」, 3천명의 정치범 석방
※2일 ▲미 공군기, 공산군 수송 차량 맹격 ▲공보처장 서리에 안연생 여사 임명
※3일 ▲순천 서남방서「미그」기 6대 격추 ▲주일 한국 대표부, 이 대통령 방일시 길전 수상과의 회담 응한다고 발표
※4일 ▲문봉제 치안국장, 이 대통령의 도일 준비차 향일 ▲미 원자력위, 작년11월의 핵 실험은 수소탄이라고 발표
◆정정=본 연재 제437회의 육군 종군 작가 단원중 성기「조」씨는 성기「원」으로 바로 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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