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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1)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29)6월 사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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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926년4월25일 이조의 마지막황제였던 순종이 승하했다. 순종의 승하는 나라를 빼앗긴 민중의 슬픔을 한층 더해 돈화문 앞에는 3천리 근역 백성의 통곡이 그치지 않았다. 국장 날에 백성들의 동요는 충분히 있을법한 일이었다. 김단야는 상해에서 북경금능 대학생인 김성순을 통해 4월 하순 권오설에게 금1천동을 보내고 선전문도 인쇄해 보낼 테니 6월10일 인산에 대대적인 운동을 벌이라고 연락했다.
권오설은 경북안동군풍천면가곡동 사람으로, 재주가 비장했고 성격이 괄괄한 사람이었다. 이웃 풍산에서 청년학교를 차려 스스로 교사노릇을 하고 노동 운동을 하다가 서울로 올라가 활동했다.
권오설은 곧 노동총동맹 인쇄직공조합위원인 경성일보 인쇄공 민창식에게 선전문인쇄를 부탁했으나 시원한 대답을 얻지 못하고 천도교청년회 간부이며 노동총동맹간부로 있던 박내원씨(72·현 천도교종법사)를 불렀다. 박내원씨는 권으로부터『자금을 벌 테니 인쇄와 천도교조직을 통한 지방연락을 취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를 쾌히 받아들여 5가지 선전문원고와4백50원을 받아 돌아왔다는 것이다.
박씨는 민창식을 설득해 인쇄기2대를 사들이고 인쇄직공조합원인 양재식·이용재등과 함께 활자와 용지를 사서 5월27일께 안국동26 민의 집에서 격문5만 여장을 인쇄했다.
한편 김단치도 거사를 위해 국내에 잠입했다. 당시 조선일보에 복직해 사회부장으로 있던 유광렬씨에 따르면 하루는 김단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와서 지금의 단성사 건너편에 있던 그의 은신처를 찾아갔더니 김은『극복하는 민중에게 격함』이라는 격문을 보이면서 글을 좀 고쳐달라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유씨는 그 글을 읽어보니 참으로 명문이어서 몇 구절을 고쳐주고 칭찬을 한 기억이 있다고 전했다. 김단야는 이 원고를 갖고 다시 상해로 가서 김찬과 함께 인쇄해 국내각지로 부쳤던 것이다. 이렇게 공산당은 6·10거사를 앞두고 준비에 열을 올렸다.
박내원은 격문을 인쇄했으나 상해의 김단야로부터 자금이 오지 않아 지방으로 운반하지 못하고 버들상자와 궤짝에 넣은 채 천도교당 안 동쪽 모퉁이에 있는 손재기의 집에 숨겨 두었다.
손재기는 의암 손병희의 종손으로 천도교당 안에 있던 개벽사의 제본책임자였다.
그런데 6월4일 종로서는 경북경찰 부로부터 일본대판의 중국 위폐범의 체포를 의뢰 받아 이동규를 검거하고 집을 수색하다 방안에 있던 담뱃재떨이 속에서 갈기갈기 찢어진 인쇄물1장을 우연히 발견했다. 때가 때인지라 경찰은 종이 한 장을 무심히 넘기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격고 문이란 제목으로 인산 날을 기해 일대운동을 일으키자는 내용이 아닌가. 경찰은 대경실색하여 이에게 출처를 추궁해 평북선천에서 금광을 하는 안정식에게서 얻었다는 자백을 받고 다음날인 5일 안을 체포해 압송했다. 안은 동향친구인 권오설이 운동자금 5천 원을 청구하면서 격문2장을 주더라고 말했다. 경찰은 현안이 되어 권을 찾았으나 잡을 길이 없었던 것이다.
때마침 그 해6월호 개벽지가 압수되어 종로서는 6일 천도교당 안의 개벽사를 수색하게 되었다. 수색을 끝낸 경찰이 모두 돌아갔으나 이때 천도교사찰을 맡은 최준호란 조선인 형사가 숨어 있다가 우연히 손재기 집 안방에서 주고받는 부인 네 들의 말을 엿들었다. 『이번 인산 날에는 참말 큰 난리가 난다는데요』라는 한 부인의 말에 이어 손재기의 14살 된 딸 정화가『그렇고 말고요. 저것 좀 보세요. 궤짝 속에 무엇을 잔뜩 넣어두었는데요』라고 무심코 내뱉었다.
결국 이것이 꼬리가 되어 격문이 압수되고 교당에 있던 사람이 모두 연행됐다. 박씨는 사태가 이런줄도 모르고 이날 천도교당에 들어서다 잡혔다. 안국동 민창식의 집에서 인쇄기도 압수했다. 박씨를 취조해 주모자 권오설의 거처를 알아낸 삼륜 주임은 입이 크게 벌어졌다. 권오설은 7일 근근 여비를 마련해 피신하려고 집을 나서다 잡혔는데 그는 자기를 잡으러온 형사에게 『여러분이 나하나 때문에 무척 고심해온 모양이니 자 어서 잡아가시오』라고 말하면서 두 팔을 내밀었다.
이런 가운데 6월10일 인산 날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만세소동이 천지를 진동했다. 이것이 유명한 6·10만세사건이다. 상해에서 김단야가 경성 역으로 부친 격문5천장이 사전에 경찰에 압수되기도 했지만 유광렬씨에 따르면 6·10만세 당일에 이 격문이 서울시내에 뿌려졌다고 한다. 경찰은 혼비백산해 일방 시위자들을 잡아들이는 한편 권오설을 따로 떼어 조사를 계속하던 중 제2차 공산당의 끔찍한 조직을 캐내고 말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이준태 홍남표 홍혜우 등이 속속 잡혀 7월12일n명이 예심에 기소됐으니 이것이 이른바 6월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만세 시위자들은 6월28일부터 공판을 받게되었는데 이는 6·10만세 사건이라고 하여 6월 사건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권오설 등의 예심을 맡은 경성지법 오정만사는 제1차 공산당사건으로 신의주지법의 월미 판사가 예심중인 박창영 등을 병합 심리하게 되었는데 전후사정은 앞서 말한바와 같이 삼륜 정부의 역할이 컸던 것이다.
강달영을 사건의 전모가 탄로 나자 변장을 하고 명치정에서「바나나」장수 노릇을 하다 7월1917일 검거됐다. 강은 이틀동안 함구무언, 경찰서안에서 자살까지 기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모든 것을 털어놓고 말았다.
당원명부 보고서·당인 등 증거품이 모두 압수되고 신흥청년동맹·한양청년동맹·노동총동맹·여성동우회 등에 대한 일제검거 령이 내려졌다. 이리하여 신의주에서 넘겨진 박헌영 등 21명을 합쳐1·2차 공산당사건관련자로 모두1백35명이 체포되어 그중1백1명이 예심을 거쳐 공판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이 사건은 당시 통칭 조선공산당사건이라고 불렀는데 사내 총독암살음모의 1백5인사건과기미년의 48인사건과 아울러 조선의 3대 사건으로 세인의 이목이 집중되었던 사건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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