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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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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남양(수원 서남지방)에 이진사의 전압이 적잖게 있으므로 그리로 옮기기로 했다.
낮에는 숨고 밤에 예진(왜진)을 건너가는데 그때 예도 예거니와, 의병을 빙자한 우리 나라사람이 더 두려웠다. 곳곳에서 예는 하나도 못 잡고 피난하는 사람 행지 황당 하느니, 공문 없느니 하고 화살이며 말 짐바리를 빼앗으며 조금이라도 거역하면 예사로 죽이니 그 무섭기 예보다 더한 것이었다.

<왜보다 더 무서운 의병>
우리 일행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으므로 그런 사람을 자주 만나도 두려울 게 없으나 다만 말 한 필마저 뺏으려 하므로 애긍히 빌어도 놓아주지 않으면 이진사가 친히 의병장에게 가서 사정하기도 했다.
그래서 어떤 데서는 빼앗은 것을 되돌려줄 뿐 아니라 군사 하나 둘씩 주어 하루 길이나 데려가라 했다. 다만 우리 일행과 홍은(홍휘?=자·부원 호·시우당 남양인 임란 때 왕을 호송·한성에서 이조 참의가 되었다. 유성룡과는 막역한 친구)부인과의 두 행차가 그러한 수탈과 죽음을 면했을 따름이다.
금양 땅에는 예가 크게 진치고 있었다. 그 진을 건너야 남양을 가게 되므로 금양 못 미처 20리쯤에서 머물러 음식하여 장만해 먹고 어둡기를 기다렸다.
밤에 길을 떠나는 데 뒤에서 사람들이 따라오며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진사의 행차가 아니시오. 평안도에서 정승 대감(유성룡)이 보내시어 왔나이다.』
아버님이 말 두 바리에 행장을 노사실로 만들어 『자제 찾으러 말과 사람을 보내니 가는 길에 금지하지 말라』하여 네 사람을 보내신 것이었다. 그들은 수소문하여 가평에 와 물으니 양근으로 가라 했고, 양근에서 다시 남양으로 떠났다 하니 급히 쫓아온 것이었다. 그들은 곧 나를 데려가겠다고 하니, 이 진사가 나를 보내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울며 떠나겠다고 호소>
『그토록 사생을 같이 하다가 오늘에사 차마 어떻게 떼어 보내겠소. 결연히 보내지 못하겠소.』
나는 그 말을 듣자 울며 기어이 가겠노라고 나섰는데 그래도 보내주지 아니했다. 나는 가만히 일어나 일행에서 벗어나려 하니 보내 온 사람중의 종놈이 나를 업고 가려했다. 그를 본 이 진사는 노하여 기어이 뒤쫓아 천억이를 보내었다. 천억이가 따라와 말했다.
『진사님이 기별이나 하여 보내려 하시는데 도련님이 어찌 그리 망령되이 하십니까』 그래도 나는 되돌아서지 않았다. 끝내 못 미더워 우리 젖어미가 또 따라 왔다. 10리쯤 나와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니 사람들이 나를 번갈아 업고 갔다. 한 마을에 들어가니 그때가 섣달 28일이라 한집에서 감투(모) 쓴 부인이 나오는데 나이가 거의 50이나 되어 보였다. 그 부인은 목놓아 울며 달려나와 나를 붙들었다.
『유복할 사 어떤 아기네는 이렇듯 살아서 부모께로 가는데… 우리도 소관의 종으로서 이만한 아기가 있었는데 강원도로 피난갔다가 예를 만나 잃어 버려 생사조차 몰라요. 매양 울고 지내는데 오늘 아기 찾아가는 기별을 듣고 보니 가슴이 한층 답답해요.』
부인은 땅에 주저앉아 흙을 후비고 울다가 한참만에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나와 당숫물(백탕조)에 절편과 권모(골무떡)를 담아다 주었다.
『행여 가다가 배고프거든 드시요.』
부인은 내가 밥 먹고 떠나도록 곁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길에 따라와 우리를 보내주었다.

<항상 보고 공손히 대접>
양근에 와서 하루를 묵고 여기서부터는 젖어미도 말에 태우고 갔다. 길가에는 도적이 무수한데 조정의 호령이 미치지 못하는 때임에도 길에 나서니 행상 차린 것을 보고 모두 공손히 여기고 반기며 극히 따뜻하게 대접하였다.
그리고 도적 없는 데를 일일이 가르쳐 주니 비록 고을엔 들르지 못하고 촌민의 집에 가도 기별을 듣고 반겨하며 후하게 함이 그지없었다.
수안(황해도 동북의 평남 경계지방) 고을에 가니 중 하나가 돗자리를 깔아주며 섬돌에 앉히고 과일과 음식을 차려 푸짐히 먹이었다.
그날 밤 하오에 도적 장수가 나왔다는 기별이 왔다. 원이 밤새도록 지응(출장할 채비를 갖춤)거동을 차리었다. 날이 새기도 전에 우리는 길을 떠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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