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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오랜만에 접하는 문제작|사회 변혁과 문학의 역비례 관계를 우리 나라 소설 사상 최초로 형상화-『굴뚝과 천장』|김윤식<문학평론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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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3월은 작품 하나가 있어 뻐근하다. 이 한줄을 써 놓고 나는 이 답의 소설평을 끝내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문예비평에서 「본문」은 본문이고 「부록」은 부록이다. 오탁번씨의 『굴뚝과 천장』 (현대문학)은 실로 오랜만에 접하는 문예비평의 본문이다.
그 이유는 다음 두 가지 사실에서 연유한다. 그 하나는 예술 작품이 본질적으로 내포하는 가장 곤란한 「패러독스」(난관)에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며, 사회적 변혁과 문학이 역사 자체가 될 때의 역비례 관계에 대한 성찰을 최초로 형상화시켰다는 점을 그 다른 하나로 들 수 있다. 그 「패러독스」란 예술 작품이 자족적 존재의 모습을 띠면서도 동시에 비자족적으로 규정된다는 점에 관계된다.
고쳐 말해 정치적 도덕적인 의도가 현저히 드러난 작품일지라도 그것이 예술의 이름에 값하는 한에 있어서는 순예술 즉 단지 형식적 존재로 해석할 수가 있으며 반대로 어떤 한 작품도 그것이 예술 작품이라 할 수 있다면 아무리 순수하다 할지라도 사회적 인과 관계의 표현으로 해석될 수가 있는 것이다. 「단테」가 격렬한 정치적 행동시인이지만 『신곡』의 순수한 미적 해석이 거부되지 않으며 「플로베르」가 아무리 형식주의 작가라 할지라도 『보바리 부인』을 사회학적으로 설명해서는 안 될 이유란 없다.
「캠퍼스」의 굴뚝에 한 여대생이 자살했고, 강의실 천장에서 한 남자 대학생이 자살했다. 이 자살의 의미는 이 작품의 예술적 형상화로 하여 미학적 테두리로 해석할 수도 있고 정치적 해석으로 접근할 수도 있다. 이 진술은 여타의 허다한 직선적 사회적 문맥 속에 놓은 작품과는 현저히 구별된다.
둘째로, 이 작품은 사회변혁과 예술이 어째서 역비례 관계에 놓이는가를 처음으로 한국 소설사에서 선명히 보였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적극적으로 봉기(4·19)에 참가하여 『굴뚝과 천장』부패 정권을 몰아낸 그는 누구보다도 제일 먼저 새로 도태한 시대에 갈망을 느꼈고… 감쪽같이 잠적해 버린 것』이라 할 때 이를 예술의 문맥으로 치환시킬 수가 있다. 혁명 행동 그것의 최후의 행위는 자유이며 거기엔 자유와 무 이외에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다.
작품을 쓴다는 것의 근본 정신에 놓인 것이야말로 이 자유냐 무냐의 선택이외의 중간이란 있을 수 없다. 예술이 순수 행위란 것은 바로 이 때문인 것이다. 혁명이 성공했을 때 그 선봉에 섰던 「마야콥스키」의 돌연한 자살의 의미란 무엇인가. 자명한 일이다. 예술은 본래적으로 현상유지를 본질로 하는 정치와는 상용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 작품의 주인공의 잠적은 11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흔적도 없이 그곳(천장)에 있었다. 누워 있는 게 아니라 흩어져 있었다. 흩어져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있다 없다를 초월한 상태로』나와, 우리와를 대면케 하는 것이다. 이 대면 속에 전율을 감지케 한 그 힘의 포착이야말로 이 작가의 예술가로서의 정신의 높이일 것이다.
이 작품 외에도 이번 달의 작품을 들추어 본 사람들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전에 없던 기묘한 현상을 목격하게 되리라. 유금호씨의 『만적』(현대문학) 조해일씨의 『임꺽정』(동상) 오효진씨의 『벼락』(신동아) 박용숙씨의 『지귀정전』(문학사상) 등등 일련의 역사물에서 소재를 택한 작품들이 이것이다. 물을 것도 없이 이들 작품은 역사 소설이 아니다.
만일 역사 소설을 하나의 양식 개념으로 본다면 한국에선 『동서강목』이전으로 소급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만일 홍모의 『임꺽정』이 황해도 어사들의 상계에서의 「디테일」을 확보하기 않았다면 그것의 성립은 불가능했으리라.
서기원씨가 『김옥균』을 썼고, 그리고는 『이조 백자 마리아상』을 현재 연재하고 있는데, 역사 소설이 양식으로 가능한가에 대한 문제점은 이 작품이 끝났을 때 본격적으로 제기해야 할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달의 이들 역사물은 빈도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고. 바로 이점이 중요하다. 왜 작가들은 『삼국유사』속의 「지귀」를, 『고려사』속의 「만적」을 그리고 「임꺽정」을 말해야 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은 반드시 그 각각의 작품 속에, 그 보이지 않는 항간 속에 선명히 놓여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그것을 작품이라 인정 할 수가 없다. 조씨의 『임꺽정』은 역사의식을 역사의식으로 대결하려 한 것이 근본적인 착오다. 역사의식에의 대결은 가장 섬세한 예술(황진이나 분청백자)로 대치시켜야 했을 것이다. 생의 인식, 그 섬세함을 떠날 때 작품은 없다.
유씨의 『만적』은 그 문제가 만적을 따라가고 있음이 주목되지만 「그리스」 「로마」전 역사를 통해 노예의 이름이 단지 「스파르타쿠스」와 「에피크리테도스」만 남아 있고 인류 4천년 문명사에서 엄연히 노예제도가 존속해 온 사실에의 성찰이 항간이 전혀 없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 작가가 숨가쁜 문체에 질질 끌려간 것은 이 때문이다. 망설임이 없는 행위는 비장미를 동반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박씨의 『지귀』는 그것이 유사 속의 시적 장치 속에 갇힌 현실을 파괴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 그것은 현실의 탈취를 의미한다.
이러한 방법 정신은 매우 긍정적이지만 의외에도 구성의 밀도가 소홀히 처리되어 있다. 이상과 같은 나의 비판을 단편이 아닌 「로망」의 척도가 아니냐고 항변할 수도 있으리라. 이 경우 나는 다만 『굴뚝과 천장』이 단편이 아닌가 라고 되물을 수 있다.
세 번째로, 박태순씨의 『고사목』(월간중앙) 황석영씨의 『노을의 빛』(월간중앙) 등의 심리적 퇴행성에 대한 문제점이다. 왜 이들은 희고투의 유년시절로 퇴행하고 있는 것일까. 부록으로 자처하고 쓰여진 이 작품들에 흥미는 없지만. 이 두 작가들이 함께 한국적 현실의 깊은 어둠을 포착해 온 그 역량을 감안할 때 문제성의 잠복이 있을 것이다.
끝으로, 박순녀씨외 『가련한 이야기』(문학사상)는 읽어 내기에 매우 힘이 들었다. 바로 어른(성인)의 소설이기 때문이다. 한 남자가 두 여자를 사랑할 경우 한쪽 여자의 시점으로 처리될 땐, 이 시점의 일방적 환상 때문에 사태의 본질이 차단된다는 점을 이 작가는 체험의 원숙성으로 애써 감추고 있다.
이 점이 문체의 통제를 위장하게 된다. 여기서 나는 문득 한국의 어른들도 작품을 좀 읽었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한다. 이 진술은 문학예술이란 근본적으로 「문청성」에 관련되어 있다는 명제와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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