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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지원작전(16)|의무(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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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전쟁 후반부터는 약품과 위생재료의 일부가 국내 민간공장을 통해 조판되었는데 이때의 의료자재 보급품목은 월4백50t의 3천3백종에 이르렀다.
한편 군 의무당국은 의지제작창을 창설, 의수·의족을 만들어 부상병들의 불구를 구제하는 등 의료시설과 함께 전상치료에 만전을 기했다.
53년에는 육군의료시설이 17개 육군병원, 8개 이동외과로 크게 확장되고 의료보급품도 월5백에 5천2백여종으로 더 늘어났다.
따라서 군 병원의 환자수용능력이 6·25당시의 5배가 넘는 4만3천여명으로 증가됐고 군의의료기재 보유현황은 T/E(장비표)의 90%에 도달했다..

<인가 없이 의지제작창을 창설>
이들 군 병원의 하루 최고 수용능력은 5만2천5백명에 달했는데 이것은 6·25초에 비하면 눈부신 발전이라 하겠다.
특히 금성지구·지형능선·백마고지·피의 능선·저격병능선 등의 고지쟁탈전이 한창 일때는 l개 지구에서 평균 1천5백여명씩의 부상자가 각 육군병원으로 후송되어 군의관·간호장교·위생병들의 의무지원은 그야말로 눈코들새 없는 격전이었다.
스웨덴·덴마크·노르웨이·서독·인도·이탈리아 등 우방들의 의료지원도 전쟁중 군 의무활동에 많은 도움을 줬다.
다음은 육·해군의무감과 일선 둔무지원에 참가했던 군 회관·간호장교의 이야기.
▲윤치왕씨(당시육군 군의감·준장=예비역육군소장·현 당평 윤 산부인과 개업·78) <나는 52년 초 회지제작창을 민들 계획을 세우고 창설 안을 만들어 미 고문관의 동의를 얻은 후 군수뇌물 들한테도 양해를 받았습니다. 회지제작창 창설에는 우여곡절이 정말 많았었어요.
김일환 국방차관과 육군참모차장 장재흥 장군의 협조를 받아 부대증설 인가도 없이 부산· 어느 민간인 2층집을 하나 빌어서 창설을 했읍니다.
각 군 병원에서 차출한 군의관과 정형외과의 권위자 이모박사에게 부대를 맡겨 창설명령도 나기전 1백여명의 불구 부상병들에게 의지를 만들어주고 수여식까지 했어요. 이쯤 일이 진행됐는데 의지창에 대한 시비가 일어나데요.
민간인 의지제작자들이 대통령 비서실을 통해 방해를 하는데다가 설상가상으로 보도부 미 고문관은 부상병에 대한 의지문제는 제대 후 국가의 사회복지 정책에 의해 해결돼야지 군에서 직접 할 일이 아니라고 반대를 하는 거예요.
하루는 대통령이 부르길래 들어갔더니 군에서 의지제작창을 만든다는 데 그런 일은 민간인이 하도록 하라고 합디다.
나는 이럴수록 기어코 일을 성공시키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하고 계속 미군당국과 접촉, 기술자 3명을 비롯한 재료와 제작장비 일체를 지원 받아 52년8월 제31육군 정양병원에 제1의지제작창을 공식적으로 창설했읍니다.
나는 개창식 때 식난을 통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격언을 인용, 의지창실에서의 애로와 기어이 성취하고만 불퇴전의 끈기를 당당히 내세웠지요. 의지제작창은 전쟁 중 6천여개의 의수·의족을 만들어 내고 휴전직후 내 후임 의무감이 폐창시켰어요.
한번은 전선을 시찰하고 내려오던 중 대전 미 육군병원을 들러 원장과 함께 병실시찰을 하는데 미 치료군의관들이 만들어 끼워준 의안을 자랑하길래 봤더니 정말 잘했더군요. 원장한데 우리 군의관을 보낼 테니 기술을 좀 가르쳐 달라고 청했더니 쾌히 응낙합디다.
대구로 내려와 2명의 군의관을 선발해 보내 대전의 63병원 군의관 l명과 함께 5일 동안 기술을 배우게 한 다음 위안부를 설치했지요.
3명중 우중령은 연구를 거듭해서 기술이 미군의관들보다도 더 좋았고 플라스틱 을 녹여 대량 생산, 실명의 부상병들에게 끼워줬어요.

<인도군 의관에게 마취법 배워>
우리 군 병원에서 마취 기를 사용하기 시작한건 전쟁 후부터입니다.
인도군의관 한사람이 대구 제l육군병원에 와서 마취법을 가르쳐 주어 각 육군병원에 점차로 보급이 됐던 거예요.
이때까지는 우리 군의관들이 마취법을 안 쓰니까 미군당국은 아예 의료장비지원 품목에서 마취기 빼버리는 실정이었어요.
▲박양원씨(당시 해군 군의감·중령=예비역 해군준장·현 경희의료원 부원장·52) <6월27일 하오 해군본부가 수원으로 후퇴를 할때만해도 나는 곧 다시 서울로 올 것으로 믿고 지하실 창고의 약품과 의료기재들을 그대로 둔채 내려갔습니다. 정황을 보니 조만간에 수복할 것 같지가 않아 하오5시쯤 위생병과 하사관 한명을 불러 GMC한대를 내주고 서울로 올라가 해본 창고의 약품들을 실고 내려오도록 명령했어요.
하오12시가 돼도 이들이 돌아오지 않아 애를 태웠는데 이튿날 상오5시쯤 되니까 약품을 가득 싣고 내려오데요.
당시의 해군병원은 진해와 인천에 각각 1개씩이 있을 뿐이었어요.
인천해군병원은 제주로 후퇴했다가 해병대 인천착륙작전에 야전병원으로 출동했읍니다.
이 해병대 야전병원은 북진 때에는 원산·흥남 등지에까지 따라 올라 갔다가 원산에서 해군병원을 창설 할 때 인원과 장비를 다시 해군이 그대로 흡수했어요.
원산 해군병원의 절대 인원이 모자라는 형편이라 하는 수 없이 의무감인 내가 병원장으로 나갔읍니다.
병원을·창설한지 10여일 만에 1·4후퇴를 당했는데 입원중인 50여명의 환자들과 기자재를 모두 해군 LST에 싣고 부산을 거쳐 제주도로 무사히 내려와 제3 해군병원을 세웠어요.
▲임석환씨(당시 수도육군 병원외과근무·소령=예비역 중령·현 중앙병원장·66) <나는 50년7월말 부산에서 군의관 시험을 쳐서 3주간의 군사훈련을 받고 소령으로 임관 됐습니다. 당시의 전황은 절망적이라 후방에서는 제주도나 일본으로 피난을 가야될 경우 군인 우선 이라는 소문이 나돌아 민간의사들이 앞을 다투어 입대를 지원하는 바람에 시험 경쟁률이 높았어요.
9·28수복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던 수도육군병원은 1·4후퇴로 마산으로 내려가 도립병원·시청·초등 학교 3개를 접수해 병동으로 사용하며 후송돼오는 부상병을 수용했습니다. <수혈 못해 전상치료에 큰 애로>
전상치료에 제일 큰 애로는 헌혈 문제였어요. 우리 자체로는 피 한방울 수급하지 못하는 실정이었고 전적으로 미군 피에 수혈을 의존했는데 지원 받는 피가 대부분사용기한을 넘은 것들이라 간혹 부작용이 발생하기도 했어요.
하여튼 수혈을 제대로 못해서 대수술 같은 것은 전혀 불가능했으니까요.
뿐만 아니라 링게르가 부족하고 식사가 부실해서 중상자들이 끝내 생명을 잃고 마는 수도 있었어요.
나는 수도육군병원 진영분동에 근무하면서 완쾌한 환자들을 대상으로 통계를 내서 한국남자의 음경 장에 관한 연구논문을 발표, 전시의 의학계에 화제가 됐어지오.
이때까지는 우리나라에 이같은 연구통계가 없었어요.
통계결과는 큰 음경은 팽창률이 1.2∼1.5배이고 작으면 3∼4배인데 아무리 팽창을 해도 원래 작은 것은 큰 것을 못 따르더군요.
▲이진희씨(당시 수도육군병원 간호장교·대위=예비역대위· 현 영진 기독직업보도센터 교장·47) <나는 49년11월 부평 군의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간호장교로 임관, 수도육군병원에 배속 됐읍니다.
전쟁 초에는 미국서 대학을 다녀 영어를 잘한다고 주로 미군의 의무당국을 드나드는 연락장교 역할을 했는데 하와이 여 장교라는 별명까지 붙었어요.
수도육군병원이 김천으로 후퇴했을 때인데 충북 영동지구 전선에 구호를 요하는 아군부상병 3백 여명이 있으니 들어가서 후진해 오라는 거예요.
병원 정보관과 함께 헬메트까지 쓰고 완전 무장을 한채 징발한 민간 트럭 5대를 끌고 들어가는데 영동일대는 미제 24사단 주둔지역이라 한국군의 출입을 제지하데요.
내려서 한 미군중령한테 사정얘기를 했더니 자기 지프에 나를 태워 부상병들이 있는 지점까지 데려다줍디다. 이렇게 해서 군·민 부상자 3백여명을 트럭 에 모두 싣고 2시간만에 김천에 도착, 도촌 병원에 수용했읍니다.
수도육군병원이 서울로 다시 올라오면서 나는 김성진 박사가 원장인 수원 야전육군병원에서 근무했어요.
12월24일 결혼식을 올리고 결혼휴가를 얻어 쉬고있던 중 1·4후퇴를 당했는데 김 박사가 밤10시즘 부르더니 무조건 현재 수용하고있는 l천여명의 환자에 대한 후송 책임을 맡으라는 거예요.
홍재유 중령(현 충북 제천서 병원개업)과 함께 수원역 미군 RTO로 나가 미 수송관한테 사정을 했지요.

<하와이 여 장교의 후송작전>
미군 수송관은 지금 열거가 부족해 미군과 장비도 제대로 후송 못하는 판이라면서 안되겠다는 거예요. 나는 후퇴 시에는 환자후송이 우선 인줄로 아는데 무슨 소리냐고 따지면서 미 국방성에 보고를 하겠다고 올러댔읍니다. 수송관 옆에 섰던 한 미군소령이 나를 잡아끌더니 사무실로 들어가 코피를 권하면서 천안·평택역의 객차를 모두 끌어올려 후송해주겠다고 하데요.
하오4시쯤 환자들을 몸도 싣고 수원역을 막 출발하려는데 영등포 야전병원에서 2백여명의 환자를 싣고 내러온 후송책임자인 국군중령이 나를 찾읍디다.
그는 미군한테 얘기를 해서 자기 병원환자 후송용 객화차 2양을 얻어달라면서 만약 우리 수원 야전병원만 떠나면 권총으로 소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객차 2양을 더 얻어 환자들을 태우고 나니까 등화관제로 불을 끈채 달려 내려오던 다른 기관차가 뒤에 달렸던 객차를 들이받아 영등포 야전병원환자 거의가 직사하고 역내는 아비규환의 수라장이 돼버렸어요. 1시간쯤 걸려 시체들을 플랫폼에 내러놓고 몇명의 생존자만을 태워 떠났는데 30분 후 중공군이 수원역을 포위했답디다. 김 박사는 날보고 1천생명의 은인이라고 하더군요.

<주요일지(1952년12월1∼4일)>
※12월1일 ▲이 대통령, 불군 대대시찰 ▲휴전회담의 공산측 대표, 미 공군이 순천의 포로수용소 폭격했다고 항의 ▲최용덕 소장, 공군참모총장에 취임 ▲양유찬 대사, 트루먼 대통령방문.
※12월2일 ▲ 유엔 정위, 한국의 즉시 휴전과 포로 강송을 요구한 소 제안을 41대 5로 부결.
※12월3일 ▲공중전서 미그2대 격추 ▲체코 정부수상 외상 등 11명을 교수형
※12월4일 ▲거제도 수용소폭동 포로11명을 부상 ▲아이크 내한, 수도사단방문 ▲유엔 군사 38이북 출어 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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