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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자마 파티를 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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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엄을순
문화미래이프 대표

환갑이 낼모레인 친구들끼리 모여서 파자마 파티를 했다. 잠옷 입고 놀았으니 파자마 파티 아니겠는가.

 고등학교 동창 일곱 명이 엊그제 양평 집으로 놀러왔다. 헤어지면 금방 죽을 것같이 붙어 지내던 친구들. 하지만 막상 졸업하고 나니 대학도 다르고, 가는 길도 달라서 긴긴 세월 동안 얼굴도 자주 못 보고 바삐들 지냈다. 지난달이던가. 한 친구의 딸 결혼식장에서였다. 이제 좀 여유가 생겼는지 시골 사는 내 모습이 궁금하다면서 구경 오겠단다. 날짜도 잡고, 음식솜씨 자랑할 만한 요리도 한 가지씩 해오겠다 하고, 차편도 나누고. 드디어 그날.

 단발머리 적 옛 생각에 맘도 들뜨고 기분도 묘했다. 일단은 예쁘게 그릇 세팅을 했다. 비싸게 사놓고서 막상 쓰려면 깨질까봐 잘 쓰지도 못했던, 내가 가지고 있는 그릇들 중 제일 귀한 그릇들로 말이다. 이렇게 좋은 날 술이 빠질 순 없고. 선물 받은 와인들 중 제일 그럴듯해 보이는 와인 서너 병을 꺼내고, 도도하게 생겨서 폼이 좀 나 보이는 키 큰 와인 잔도 준비했다.

 멋 부린 티는 안 나지만 입으면 예쁜 좋은 옷도 챙겨 입었다. 완벽했다. 이런 걸 부잣집 마나님 시장 패션이라 하던가. 파티에 기본은 음악. 재즈를 잔잔하게 틀어놓았다. 치즈 카나페는 아니더라도 쿠키 정도는 있어줘야 하겠기에 접시에 막 쿠키를 담는데 시끌벅적 친구들이 도착했다.

 가져온 음식들. 화려했다. 카레와 하이라이스를 짬뽕한 것 같은 것도 있고 금방 속초에서 공수해 온 도다리회도 있고. 맛깔스러운 매운탕에다 굴전까지.

 하지만 그 음식들을 퍼질러 앉아서 먹기에는 입고 온 옷들이 좀 거추장스러웠다.

 타이트 스커트, 스키니 바지, 뻣뻣한 청바지. 하나같이 보기엔 멋져 보여도 바닥에 퍼질러 앉을 수는 없는 옷차림. 그런데. 내겐 손님용 수면바지가 열 벌이나 있다. 보글보글 타월감으로 만든 알록달록 형형색색 바지를 사람 수대로 꺼내왔다. 입으면 잠이 온다고 이름도 수면바지다. 예쁜 핑크 바탕에 하트 무늬도 있고, 하늘색 바탕에 멍멍이, 병아리색 바탕에 원숭이까지.

 그런데 갈아입은 수면바지의 공은 컸다. 애들이 갑자기 변하기 시작했다. ‘음악 좀 바꾸자. 예전에 좋아했던 거 있잖아. 트리퍼스나 키보이스 같은 거 말이야.’ 내친김에 난 디제이 노릇까지 했다. 김훈과 트리퍼스의 ‘옛님’으로 시작해서 키보이스의 ‘정든 배’ 그리고 히식스의 ‘초원의 빛’까지.

 좋은 음악과 와인과 맛있는 음식. 다들 흡족했던지 배를 깔고 누워 LP재킷을 들여다보며 깔깔대기 시작했다. ‘어머, 그때 내가 좋아했던 사람이 이렇게 생겼었구나.’ ‘리더인 김훈 좋아했던 게 너지?’ ‘넌 키보이스에서 드럼 치던 노광일에 미쳤었잖아.’ ‘어머나 내가 그랬나?’ 음악은 점점 신나지고 몸을 흔들기엔 힘이 모자라고. 다들 누워서 다리를 올리며 흔들어댔다. 영락없는 수중발레 폼이다. 다리를 뒤틀며 올리다 보니 윗옷도 불편했나 보다. ‘네 딸 입다 늘어난 티셔츠 같은 것 좀 가져와라. 갈아입자.’ ‘없으면 누렇게 바랜 니 남편 난닝구도 괜찮아.’

 멋스럽게 차려입고 나타난 애들이, 누렇게 바랜 티셔츠랑 알록달록 수면바지 차림으로 바뀌었다.

 ‘저런 노래 들으니 그 시절이 눈에 선하다. 그동안 왜 다 잊고 지냈을까.’ 한 친구의 고백도 있었다. 노래란 참 묘하다. 노래 속에, 그걸 듣던 그 시절 그때의 모든 일이 꽁꽁 숨어 있다가, 노래가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 시절의 추억들이 뭉텅이로 와글와글 터져 나오는 걸 보면 말이다.

 와인 볼 줄 안다는 친구가 말했다. ‘이 와인 어디서 났니? 엄청 좋은 거야. 지금 마시지 말고 제일 귀한 손님 오면 그때 꺼내.’ 결국 그 와인은 따지 않은 채 남겨놓고 친구들은 떠났다. 내게 제일 귀한 손님. 과연 누굴까. 건강한 지금의 나를 있게 한, 힘겨웠던 사춘기 시절을 옆에서 함께 울며 웃으며 잘 넘겨준, 바로 그 친구들 아닐까.

 와인을 핑계 삼아 ‘파자마 파티’ 한 번 더 해야겠다. 그땐 망설임 없이 그 비싸다는 와인을 따서 너희들 잔에 가득가득 채우리라. ‘생각해봤는데… 내게 제일 귀한 손님은 바로 너희들이더라’란 말도 안주로 내놓으며 말이다.

엄을순 문화미래이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