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니 리의 중국 엿보기] 장성택 없는 북·중 관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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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정부의 장성택 몰락에 대한 관전법은 사뭇 흥미롭다. 처음부터 “이것은 북한의 내정”이라고 확실히 선을 그었다. 마치 자기와 관계없는 먼 산 불구경하듯이 말이다. 한국이 청와대에서 국가안보회의를 열었고, 미국 백악관이 “북한 내부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이례적인 논평을 내놓은 것과도 대조적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훙레이(洪磊) 외교부 대변인의 발언이다. 그는 “중국은 북한과 전통적인 우호관계와 협력을 유지해 갈 것”이라고 말했다. 북·중 관계는 몇 년 전부터 혈맹에 기반을 둔 ‘전통적 우호관계’에서 정상적인 국가 관계로 변화되고 있다는 게 일반적 시각이다. 그런데 장성택 처형을 전후해 갑자기 요즘에 안 쓰던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어느 중국 학자는 “이 표현을 들어본 지가 2년여 만에 처음인 것 같다”고 말했다.

북한도 조금 이상하기는 마찬가지다. 북한이 밝힌 장성택 사형집행문에는 “미제와 남조선에 편승했다”는 죄목이 있다. 그리고 “나라의 귀중한 자원을 헐값으로 팔아버리는 매국 행위를 했다”는 죄목도 있는데 그 자원을 헐값에 산 국가의 이름이 명시돼 있지 않다. ‘중국’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게 뻔한데도 말이다. 중국과 북한이 서로에게 보인 ‘작은 배려’는 향후 관계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에 대한 풍향계다. 적어도 ‘파탄’이 날 가능성은 희박하다.

중국 환구시보는 최근 “김정은의 조속한 방중을 위한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설을 썼다. 여기에도 흥미로운 점이 있다. 이 사설을 중국 공산당의 공식 입장을 대변한다는 기관지 인민일보가 넌지시 자사 웹사이트에 옮겨 게재한 것이다. “중국 정부가 북한에 시그널을 주는 것”이라고 중국의 한 학자는 풀이했다. “장성택 사건은 북한 내부 일이니 간섭하지 않겠다. 하지만 뒤끝 없이 잘 처리하고 오라”는 메시지라는 얘기다.

장성택 사건은 꼭 북·중 관계의 ‘악재’가 되는 것 같지 않다. 김정은 쪽에서는 중국이 의지하던 장성택을 보란 듯이 제거함으로써 이제 나이 어린 지도자를 직접 상대해야 함을 알리는 효과를 거두었다. 사실 중국은 김정은이 ‘등극’한 뒤 그의 권력 장악력을 늘 의심하고 있었다. 중국이 우려하는 북한 급변사태 등 불안정성이 증가할 수 있어서다. 이번에 장성택 제거 과정에서 드러난 잔인함과 일사불란함을 보고 중국은 오히려 김정은을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눈치다. 또한 북한의 최고권력자가 김정은이란 게 확인된 마당에 장성택 같은 ‘중간인’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소통하게 된 걸 더 바람직하게 생각할 수 있다.

환구시보는 이 사설에서 “김정은의 조속한 방중을 위한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무엇보다 북한이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썼다. 장성택 숙청 사태가 몰고 올 북한 내부의 풍파를 김정은이 잘 정리하면 방중을 허락하겠다는 것이다. 현재까지는 김정은이 이 조건을 충족하고 있다. 속전속결로 장성택 처형을 집행해 ‘장성택 시대의 종언’을 명확히 함으로써 내부 동요를 차단했다. 동시에 북·중 간에 진행되던 경협을 그대로 추진하고 있다. ‘북한에 아무 일도 없다’는 정세 안정의 시그널을 대외적으로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항간의 우려와 달리 김정은이 이번 사건을 통해 1인 영도체제를 완성하고 대외적으로는 명실상부한 최고지도자로 인정받는 계기가 될지 모른다.

스탠퍼드대 아태연구소 팬텍펠로
boston.sunny@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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