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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6) 서북청년회(36)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테러」의 연속

<전남 방직경비대원 피살사건>
김모 대원이 산 속에 생매장 됐던 부안 사건의 재판이었다.
희생된 대원은 당시 21세 가량의 평안도청년. 전남도지부 김기홍 총무부장(황해도), 담양 김덕정 지부장 등 수명의 동지들과 함께 전평권인 전방에 취직해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실종, 광주 천하류(광천동) 모래밭에서 생매장된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숨겨왔던 신분이 탄로나 전평측 맹련 직공들에게 납치되어 변을 당한 것이 분명했다.
현장은 보는 이의 피를 거꾸로 흐르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몸뚱어리는 선 채로 머리끝까지 모래 밑에 들어가 있었고 말뚝 하나만이 어떻게 삐어져 나와 그의 소재를 알리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몸을 뽑아보려고 발버둥을 치다가 끝내 질식사했음을 말해주는 자세였다.
도지부 현청 부위원장·김기홍 총무부장·배동혁 차장·김제혁·제한형제 등 80여명으로 조직된 보복 「팀」은 다음날 피눈물을 흘리며 전방을 전면공략, 좌익계 직공들을 닥치는 대로 때려 뉘어 그의 원혼을 달랬다.
이날 「테러」는 임일 대표가 내려가 직접 진두지휘했다.

<부산극장 투탄사건>
감쪽같은 「테러」(서청측) 의「모델· 케이스」.
당시 이 극장에선 좌익문련주최 예술제가 열려 민중봉기를 선동하는 조의 연극「동학난」이 공연되고 있었다. 배역진은 문예봉·신부출 등의 「톱·스타」들. 연극은 인기가 대단해 10일째 초만원을 이루며「롱·런」기미까지 엿보이고 있었다.
서청은 사건당일 80여명의 대원을 동원, ▲하수인 허원섭 대원을 2층 왼편 돌출부 좌석에꽂아놓고 ▲50여명은 허대원 뒤편에 ▲50여명은 1층 왼편 앞에 각각 배치했다. 총지휘 손전선전부장의 위치는 2층 맨 앞줄 한가운데. 1층 대원들이 싸움판을 벌여 장내의 모든 시선을 오른쪽 구석으로 끄는 순간 왼쪽 끝의 허동지가 시선의 공백을 뚫고 「다이너마이트」를 던지며 뒷좌석을 메운 대원들은 그의 도주로를 틔운다는 작전이었다.
거사시간인 8시30분 농악공연으로 시끄럽던 무대가 숨막히는 연애장면으로 바뀌어지는 순간, 작전대로 1층 대원들은 난투극을 벌였으며 「다이너마이트」는 허동지의 손을 떠났다.
무대가 박살이 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2층 관람석까지 순식간에 수라장으로 변해 수십명이 1층 관람석으로 밀려 떨어졌으며 일을 마친 허동지는 그 속을 비집고 유유히 자취를 감췄다.
민애육 대원 1백 여명이 만일에 대비, 극장 주변을 물 샐 틈 없이 경비하고 있는 가운데 벌어진 거사였다. 보기 좋게 그들을 우롱한 솜씨가 아닐 수 없었다.

<정검사 및 민전 박의장 암살>
부산의 좌익계를 위축시키기 위한 결정적인 포석이었다.
정검사는 동래고보를 졸업, 독학으로 일정 때 고문을 「패스」한 약관. 그에 대한 한민당경남도지부 간부 곽경종씨(작고), 이하순씨(작고) , 전창권씨(서울서 사업)등의 말은 『공산당사건이 그의 손에 넘어가면 모조리 풀려 나온다. 그가 있는 한 좌익 타도는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 말대로 정검사가 분명 좌익편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되 그의 제거가 적어도 좌익측에 심리적인 위축감만은 줄 것이 분명했다. 그는 이 때문에 서청의「타기트」가 돼서 1주일동안 미행한 행동대 허동지의 권총을 받았다.
박의장의 경우도 마찬가지. 부산 제일의 양조장 대선주조의 사장인 그가 자의로 민전 의장이 됐다고 보기는 어려웠으나 어쨌든 좌익단체의 우두머리였기 때문에 공격목표가 됐다.
수소문한 결과 소실집에 있다는 것을 알아낸 저격책 이척식 동지와 지령자 엄정일 부위원장은 그날도 한민당 차를 빌어타고 가 총알 2방을 먹였다.
한편 집안 살림이 정돈되지는 않았지만 서울만이 침묵을 지키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시 천구당에서 열린 민전대회에 수류탄을 던져(6월 중순) 남선 전역을 휩쓴 하반기 총공세에 일익을 맡았다.
이날 대회는 좌익계 거물과 군중들로 성황을 이루고있었다.
여운형 민전의장(근노 인민당 당수)·홍남표 남노당 부위원장, 장건상 근노 인민당 부당수를 비롯, 성주식 등 거물들이 단상을 메웠고, 군중들도 교당을 메우고(6백명 수용) 뜰에까지 넘쳐나고 있었다(1천명 추산) .
해산을 할 무렵 동쪽 창문으로 투척된 수류탄은 단상 바로 밑에 떨어져 취재를 하던 좌익 현대일보기자 이모 등 수명을 부상시켰다.
단상에 떨어지지 않은 것은 창 밖까지 들이찬 군중들을 경계, 눈치를 살피며 적당히 어림을 잡아 던졌기 때문이었다.
군중들 덕분으로 서청이 노린 의장단은 무사하고 엉뚱한 기자 등만 다쳤지만 그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 거사였다.
이날 수류탄을 던진 대원은 문희모 총무부차장과 김범윤 동지(현재 인쇄업)였다.
시천구당으로선 46년 11월24일 남노당 결성식에 이어 두번째 맞는 폭탄세례였다.
이날 사용된 수류탄은 대속 신문사장 이종형씨가 대주었으며 크기는 호박만 한 것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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