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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소형 아파트 사는 80대 부부, 청주선 평생 노점상 할머니 … 1억 선뜻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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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지난달 20일 오전 평범한 주부 차림의 50대 여성 두 명이 부산시 동구에 있는 부산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무실로 들어섰다. 그중 한 명이 “기부를 하겠다”며 검은색 가방에서 흰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5만원권, 1만원권이 섞인 현금 1000만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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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희 어머니 장례 치르고 남은 돈입니다. 가족이 모여 상의했는데 어머니라면 이 돈을 기부하셨을 것 같아서 찾아왔습니다.”(여성)

 “인적사항을 기록하는데, 성함 좀 알려주시겠어요.”(모금회 직원)

 “아닙니다. 어머니가 기부하시는 것이지 저희가 하는 게 아니에요. 어머니 이름으로 해주세요.”

 연장자로 보이는 다른 여성이 “어머니께서 생전에 기부를 조금씩 하셨어요. 그 뜻을 따르는 겁니다. 노환으로 병상에 누워 있다 돌아가셨어요. 어려운 노인 병원비로 써주세요”라고 말한 뒤 사라졌다.

 지난달 20일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연말연시 불우이웃 돕기 모금 캠페인이 시작된 뒤 전국에서 얼굴 없는 기부천사들이 줄을 잇고 있다. 모금회에 이름을 알리고 기부하면 소득공제를 받을 수 있는데도 익명 기부에 나서는 것이다.

 지난달 26일 전북사회복지공동모금회 계좌로 1억원이 입금됐다. 기부자 정보는 입금자명이 전부였다. 모금회 측에 기부를 알리는 전화도 없었다. 모금회가 입금자를 찾아나섰다. 은행과 지자체를 수소문했더니 전주 시내에 사는 80대 노인이 주인공이었다. 전화를 걸어 감사를 표시하자 이 노인은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하려고 했는데 전화를 왜 했느냐”며 “절대 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박완수 전북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무처장은 1억원 이상 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Honor Society)’ 가입을 권유하기 위해 노인의 집을 찾아갔다가 놀랐다고 한다. 66㎡(20평형)가 약간 넘는 작은 아파트 거실에서 노인의 아내가 배추 시래기를 다듬고 있었다고 한다. 그 노인은 “살 날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제야 (기부를) 했다는 게 부끄럽다”며 신상을 비롯한 자세한 정보를 공개하기를 한사코 거부했다. 영수증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아너 소사이어티에도 익명으로 가입했다. 전북공동모금회 박 처장은 “집안 가구가 모두 색이 바랬고 곳곳에서 검소함이 묻어 있었다”고 말했다.

 지난달 21일엔 고무신을 신은 팔순의 할머니가 충북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무실을 찾았다. 할머니는 “내 이름도 나이도 묻지 말라”는 말과 함께 봉투 한 장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봉투 안에는 1억원짜리 수표 한 장이 들어 있었다. 할머니가 청주의 한 재래시장에서 노점상을 하며 평생 모은 돈이었다. 할머니는 “한국전쟁 때 혼자 월남했는데 청주 사람들이 십시일반 도와줬다. 그때 받은 은혜를 갚는 것”이라고 말했다. 할머니 역시 아너 소사이어티에 익명 회원으로 가입했다. 2010년 출범한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 400명 중 65명이 익명이다.

 기부천사들의 기부 행렬에 힘입어 올해도 사랑의 온도탑 온도가 꾸준히 올라가고 있다. 14일 현재 수은주는 42.8도. 모금 목표인 3110억원의 42.8%인 1329억8973만원이 들어왔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대외협력본부 선년규 부장은 “지난해 같은 기간(45.9도)에 비하면 약간 낮지만 불경기를 감안하면 모금이 잘 진행되고 있는 편”이라고 말했다.

 ◆구세군 자선냄비에 6800만원 무기명 채권=서울 명동의 구세군 자선냄비에는 지난 12일 6800만원 상당의 무기명 채권이 성금으로 접수됐다. 15일 구세군에 따르면 12일 오후 2~3시쯤 코트 차림의 60대 신사가 봉투를 넣고 사라진 뒤 확인해 보니 채권이 담겨 있었다. 시중은행이 발행한 이 채권은 발행일이 2004년 2월 27일, 상환일이 2009년 8월 27일이다.

이서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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