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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기의 글로벌 포커스] ‘엔저 공습경보’의 진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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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3호 20면

지금으로부터 꼭 1년 전. 일본 ‘엔저(엔화 약세)’의 엄습을 알리는 공습경보가 요란했다. 아베 신조 총리의 야심찬 아베노믹스에 가장 긴장한 게 한국이었다. 엔저에 따른 수출 둔화 우려 때문이었다. 지난 1년을 돌아보면 한국 기업들은 엔저 위기를 나름 잘 극복했다. 올해 한국의 무역흑자는 430억 달러로 사상 최대를 기록할 전망이다. 자동차와 같은 일부 업종에서 일본 제품에 밀려 채산성이 나빠지긴 했지만 전기·전자 등 여러 업종에서 경쟁력을 지켜냈다. 한국은 특히 중국 시장에서 일본을 밀어내고 처음으로 수출 1위국 자리를 차지했다.

우리가 잘하기도 했지만 일본이 너무 못했다. 엔화 가치가 20% 이상 떨어졌지만 일본 기업들은 이를 투자와 제품 혁신, 마케팅의 호기로 활용하지 못했다. 그저 늘어난 순익에만 안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 기업들이 쌓아둔 현금은 무려 450조 엔(약 4600조원)으로 불어났지만 투자를 거의 늘리지 않았고 임금도 고작 0.1%만 올려줬다.

아베노믹스 1년, 김 빠지는 일본 경제
가장 큰 문제는 자신감 결여와 구조개혁에 대한 불신이라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적했다. 일본 기업들은 2000년대 중반 반짝 엔저의 호시절이 왔을 때 국내 투자를 대폭 늘렸던 적이 있다. 소니와 샤프·파나소닉 등이 앞장섰다. 하지만 뒤이어 다시 엔고가 도래했고, 한국과 중국 기업들에 기술 우위까지 상실 당해 결국 생산라인을 상당 부분 폐쇄하고 말았다. 그런 상처 때문인지 ‘현금이 최고’라는 보신주의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정부 책임도 크다. 아베 총리는 자신의 경제 정책을 3개의 화살에 비유했다. 무제한 돈 찍어내기(양적완화), 재정 지출 확대가 첫째와 둘째 화살이다. 두 화살은 과녁의 중심이 꽂혀 그런대로 효과를 냈다. 물가가 연 1% 선으로 올랐고 엔화 가치도 급락했다. 주가가 50%나 뛰었고 소비심리도 살짝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세 번째 화살은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아베의 ‘성장 전략’이다. 그는 “각종 규제를 철폐하고 시장을 자유화하는 구조 개혁으로 일본을 세계에서 가장 기업 하기 좋은 곳으로 만들겠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지금 그걸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FT는 보도했다. 얽히고설킨 이해당사자들의 저항, 거기에 교묘히 편승해 큰 정부를 유지하려는 관료주의, 목소리 큰 지역 민원인들 앞에 무기력한 정치권 등이 아베를 주저앉혔다. 종신고용 전통의 경직된 노동시장도 넘기 힘든 장벽이었다.

일러스트 강일구

‘구조개혁’ 화살 부러진 게 결정타
아니나 다를까. 지금 일본 경제는 활력이 다시 떨어지는 모습이다. 올 3분기 성장률은 1.1%로 시장의 기대치(1.6%)에 못 미쳤다. 물가 오름세도 멈춰 디플레이션 우려가 고개를 들고 있다. 무역수지에 이어 경상수지마저 적자로 돌아섰다. 내년 4월 소비세 인상(5→8%)을 맞아 내수 소비도 위축될 조짐이다.

다급해진 아베는 네 번째 화살을 꺼내 들었다. 기업에 대한 노골적인 임금 인상 압박이다. 아베는 ”(양적완화와 엔저 덕분에) 기업들이 순익을 늘렸으니 임금도 올리는 것이 맞다”고 했다. 임금이 오르면 소비가 늘고 물가도 오를 것이란 생각에서다. 하지만 기업들은 “계획경제도 아니고 시장경제 체제에서 총리가 임금을 올리라고 해서 그저 따라갈 수는 없지 않느냐”는 반응이다.

일본은행(BOJ)도 조바심을 내고 있다.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 BOJ 총재는 최근 “물가 상승률이 2% 선에 안착할 때까지 확장적 통화정책을 계속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필요하면 양적완화를 확대할 수도 있다고 했다. 외환시장은 민감하게 반응해 엔화 약세 흐름이 다시 거세졌다. 현재 달러당 103엔 선인 엔화가치가 내년 중 110엔을 넘어 120엔에 도달할 것이란 전망도 나왔다.

한국, ‘원高’를 내수산업 육성 호기로
한국에는 2차 엔저공습 경보가 울리고 있다. 일부 외국인은 주식을 팔고 한국을 떠나고 있다. 그러나 1년 전과 마찬가지로 막연한 불안감에 호들갑 떨 일이 아니다. 냉정하게 일본 경제를 살피고 나름의 대응책을 세우면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

아베노믹스 1년이 고마운 ‘반면교사’다. 경제가 한번 구조적으로 망가지면 재건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를 깨닫게 한다. 근본 체질 개선 없이 환율·금리 등 가격 변수를 동원해 봐야 효과는 제한적이란 사실도 알려준다. 일본을 보며 일희일비할 때가 아니다. 우리 내부를 냉정하게 돌아봐야 한다.

원화가치의 상승은 거스르기 힘든 대세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한국 원화는 달러와 유로화 등에 견줘 저평가 혜택을 과도하게 누렸던 게 사실이다. 고환율 시대는 가고 있다. 수출 기업들은 제품 경쟁력으로 정면 돌파한다는 의지를 다져야 한다. ‘원고(高)’에 따른 가계의 실질 구매력 상승은 내수 서비스산업 육성의 밑거름이 될 수도 있다. 일본이 못한 규제 혁파를 한국이 해낸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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