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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그 역사와 전통|김달성<작곡가·단국대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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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신춘의 우리악단에 커다란 희소식이 전해졌다. 세계정상의 명성과 전통을 가진「비엔나·필하모닉·오케스트라」전원이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와서「비엔나」음악의 정수를 들려주게 된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 음악인의 오랜 소망이었고 또한 우리문화계의 크나큰 쾌 사라 아니할 수 없다.
「비엔나·필」의 역사는 오래다. 1842년 궁정「오페라」극장 전속의「필하모니·아카데미」로 출발했고 당시 정치·문화 등 모든 부문에 걸쳐「유럽」의 중심이었던「비엔나」에서 때마침 구름 떼 같이 쏟아져 나온 대 작곡가들의 작품을 연주하여 음악사에 찬란한 영광의 시기를 이룩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해온 것이다.
민간단체로 출발한「비엔나·필」의 초대지휘자는「오토·니콜라이」였다. 매일 밤「오페라」연주에만 종사해서 순수음악연주에 대한 정열과 동경이 커진「니콜라이」는 악단 원들과 상의하여 연 4회의 정기연주회를 갖기로 했다.
이후 1860년 국립교향악단으로 개편되었고 밖에 나와서 연주할 때 이름을「비엔나·필하모니카」로 붙이게 되었다. 그 고장에서는 지금도「비엔나·필」의 연주를 속칭「니콜라이·콘체르토」라고 부르며 연 10회까지 연주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비엔나·필」은 실은「비엔나」국립「오페라」관현악단과 같은 단원들이며「오페라」극장 안에서와 밖에서 연주회를 가질 때 각각 이름이 다른 것이다.
그 동안 이 교향악단을 거쳐간 여러 지휘자들은 모두 당대에 으뜸가는 거장들이었다. 「니콜라이」를 위시해서「헬메스·베르거」「에케르트」「데소프」「말러」「R·슈트라우스」「브루노·월터」등이 직접 이끌어왔고 그 외에 객원 지휘로「토스카니니」「사바타」「뷤」「카라얀」「번스틴」등 일류급 예술가들이 자주 지휘봉을 들었다. 한동안 여러가지 사정으로 상임지휘자를 두지 않았던「비엔나·필」이 얼마 전「이탈리아」의 젊은 귀재 「클라우디오·아바도」를 종신지휘자로 맞게 되어 앞으로 내적인 발전과 심화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이 악단의 역사가 이러하니 그 단원들의 긍지 또한 대단하다. 같은「오스트리아」지만 조금 떨어진「린츠」시에 살던「브루크너」가「비엔나」에서「비엔나·필」에 의한 작품연주를 위해 여러 난관을 겪었던 것은 그들이 얼마나 보수적이고 또 배타적이기도 한가를 얘기해주는 하나의 예다.
이 오랜 역사를 지닌 명문이 그 동안에 쌓아 오고 또 지금도 자랑으로 하는 전통은 이 악단 원의 한사람 한사람이 순수한「오스트리아」음악의 정수를 몸에 지닌 일류급 음악가라는 점이다. 따라서 이들이 모여서 만드는 음악도 철두철미「비엔나」적이다.
19세기초 왕정 때의「메테르니히」이후 대중음악에서부터 순수음악까지 전체 시민들에게 체질화되고 생활화된 그들 자신의 음악은 지금도 이 단원들의 가슴마다에 면면히 흘러 가벼운 음악이건 거장의 대작이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연주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적인 교향악단은 모두 그 특색이 있다. 혹 어떤 이는「프랑스」같은 관악기의 음색이 아쉽다고도 하나,「비엔나·필」의 그 고운 정감 깊은 현악기의 음색은 어느 교향악단도 추종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음악의 본 고장으로 군림한「비엔나」의 가장 격조 높고 긍지 강한 이「비엔나·필」은「비엔나」의 모든 계층의 총애와 존경을 받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아버지가 유산을 물려줄 때 다른 문 건과 함께 이「비엔나·필」의 회원권도 전해주는 고장, 1960년 초 영국서부터 선풍을 일으켰던「비틀즈」가「비엔나」에만은 발을 붙이지 못했던 일, 이런 것들도 크게는 역시「비엔나·필」과 관계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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