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종군기] 안성규 기자 국경 사막캠프서 4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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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똑같은 전장(戰場)에서 똑같은 적을 상대로 똑같은 전쟁을 다시 치르는 것은 미국 역사상 처음이다. 그런 전쟁은 세계사에서도 드물다.

기자가 배속된 쿠웨이트 북부의 캠프 버지니아에는 이런 희귀한 전쟁을 치르는 장병들이 있다. 12년 전 쿠웨이트와 이라크 사막에서 사담 후세인의 군대와 맞섰던 '걸프전 참전용사'들이다. 그들은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 속으로 다시 떼밀려 들어가고 있다.

16전투지원단 485대대 26중대의 리처드 워거맨(37)병장. 1991년 1월 걸프전이 터질 때 미국 텍사스에 있는 1보병사단 588 브래들리 기계화 대대의 전투병이었던 그는 쿠웨이트 북부전선의 캠프 버지니아에 파병됐다. 지금 옛 전장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해 1월 15일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 군을 격퇴하기 위한 다국적군의 대규모 공습이 시작됐다. 수일간의 공습이 끝나고 난 21일 그가 소속된 브라보 중대는 지상 공격의 최선봉을 맡았다.

그의 소대는 그 중에서도 선두였다. 20여명의 병사들은 '최후의 만찬'으로 햄버거를 먹었다. 오후 11시30분 병사들을 태운 다섯대의 브래들리 장갑차는 사막을 가로질러 북쪽으로 올라가 이라크 전선을 돌파했다.

병사들은 승전의 결의와 죽음의 공포 속에 끼여 있었다. 둔덕을 넘으면서 차량이 적의 사정권에 노출될 때마다 대전차포가 날아올까 가슴을 졸였다. 브래들리 대대 왼쪽으론 보병부대, 오른쪽으론 에이브러햄 탱크대대가 나란히 진격했다.

날이 밝자 워거맨의 부대는 이라크 남부 도시 바스라에 다가서고 있었다. 길옆 흙담 너머에서 총탄이 날아왔다. "응사하라!" 워거맨은 소리쳤다. 장갑차들은 기관포를 퍼부었다. 내려가보니 이라크 병사 3명이 벌집이 돼 있었다. 모두 앳된 얼굴이었다.

바스라를 뚫자 저항은 거의 없었다. 이라크 병사 시체들이 길가에 쌓여 있었다. 시체를 실어 담도록 후방에 연락하는 것도 워거맨이 할 일이었다. 탱크가 달리면 백기가 흔들렸다. 지치고 남루한 이라크 군들이 투항해왔다.

22일 오후 9시쯤 탱크부대는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20㎞ 앞에 멈춰섰다. 다국적군의 전략에 따라 공격이 중지된 것이다. 다국적군은 이란 등 아랍 급진국가를 견제할 세력으로 사담 후세인 정권을 유지하기로 했다.

탱크부대는 여기 저기 남아 있던 저항 세력과 마지막 전투를 치렀다. 이라크의 스커드 미사일이 유성같은 꼬리를 남기며 밤하늘을 날았다. 워거맨 부대원들에게는 총탄과 화염병이 날아왔다. 4시간이 지났을까. "사격중지!" 소리가 들렸다. 전투가 끝난 것이다.

워거맨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평화는 없었다. "악몽에 시달렸어요. 내가 시체가 돼 있고 그 얼굴이 나에게 달려들더라고요. 폭탄에 맞아 온몸이 산산조각나기도 했어요. " 그는 술을 많이 마셨고 군생활도 청산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상처도 아물었다. 워거맨은 트럭운전사를 거쳐 99년 이병으로 재입대했다. 군인이 역시 취향에 맞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제2의 걸프전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이번 업무는 수송 트럭 조장.

그에게 악몽을 선사했던 시체를 치우는 일도 해야 한다. 워거맨은 "이번엔 후세인의 저항이 훨씬 심해 어렵고 힘든 전투가 될 것이다. 사망자도 많을 것 같다"며 걱정했다. "12년 전 그때 끝냈어야 했는데…. " 워거맨의 한숨이 모래바람에 날려간다.

안성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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