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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문학평론가>|글을 쓴다는 것의 어려움이 산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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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새해 들어 나타난 소설들 속엔 글을 쓴다는 것의 어려움이 도처에서 목격된다. 언어를 수단으로 하여「침묵」을 만들어낸다는 것의 의미를 문학본질논의 차원으로 환원시켜도 좋을 것인가 이「망설임」이야말로 작가의 영광된 몫이라 한다면 독자는 그럴수록 가혹해도 되리라.
하근찬씨의『원 선생의 수업』(현대문학)은 오늘날 한국현실에 대한 정당한 문제설정을 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이유 때문에 가혹하게 읽어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직입 적으로 말해서 이 작품은「황국신민의 세대」전부에 걸리는 잠재의식의 심리적 측면이며 이 의식의 극복 없이는, 자기를 찾는 주체성이 존재할 수가 없을 것이다. 지난해만 하더라도 일본관광객이 수십만에 달했으며, 일어는 물론「페리」호로 건너온 일본 거의 선명한「넘버」가 눈에 띈 현상이었다.
그 속에는 식민지교육의 앞잡이들이 무슨 학자로, 사업관계로 몰려든다. 남대문은 조석으로「도오뀨·호텔」을 우러러보게 되어 있다. 일인은사 환송회가 벌어진다.『세월이라는 것을 실감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느덧 27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서 다시 이 땅을 찾아온 일본인을 환영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비록 옛 스승이기는 하지만.』이토록 엄청난 안일성으로 하씨는 주인공 원 선생을 희화하고 있는 것이다.
교단에서「왜구」, 「훈도시」등등을 들어 애국자연하는 이 가련한 역사 선생이야말로 식민지교육의 노예였던 것이며, 환송「파티」의 추태로 종말을 고한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 두 가지에 있다. 그 첫째는 이러한 원 선생「타이프」야말로「황국세대」의 전형인데, 그 사실을 스스로가 모르고 있다는 점이며, 현실을 대처하는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점이 그 다른 하나이다. 나는 물론 하씨에게 이 지적을 해두는 것이다.
가혹한「리얼리즘」의 작가가 아니고는 이 문제를 삼가는 것이 다음 점에도 유효하리라. 그것은 작가 자신의 정신의 광 망을 황폐화시킴과 동시에 독자의 의식을 잠식한다는 사실에의 성찰 때문인 것이다. 가장 방치해 둘 수 없는 사실중의 하나인 이 문제를 위해서는 처절한「리얼리즘」의 싸움이 있든 가, 아니면 그만두는 편이 낫다.「빼앗긴 들에도 봄」이 왔지만 작가에겐 이 진술은 무의미한 것이다.
일인은사들이 가졌던 세대의 모든 작가는 이에 대한 책임부터 져야할 것으로 한국문학의 이름은 마땅히 요구할 권리가 있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 문제삼고 싶은 것은 오효진씨의『사육』(월간문학) 이다.『어떻게 해서 내가 이 제국주의의 냄새가 풍기는…대학병원의 특별 실에서 갇히게 되었는지, 생각하면 도무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이 작품 첫줄에서「제국주의 냄새」「특별실 감금」「자기자신이 알 수 없는 이유」라는 세 가지 구도가 확연히 전제된다.
비스듬히 읽는다면 주인공이 귀 바퀴에 종기가 나, 그「유액」이 배란불능에 작용하는 특효약이 되어 병원당국의 실험용으로, 그리고 전 인류를 위해 한 개인의 인간성 말살의 상황에 놓여졌다는 것이다.「헝가리」의 어떤 평론가의「리얼리즘」논에 의하면 이 작품은 반「리얼리즘」으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씨의 의도가 무엇인가를 파악한다면 규범 논으로 율 해질 성질의 작품이 아닐 것이다.
내 생각엔, 오씨는 분명히「조지·오웰」의『동물농장』과『1984년』을 결합해보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이 작품의 우화성의 도입이 글쓴다는 것의 모험성과 문제의 높이가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오씨의 역량을 엿보게 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셋째로 강용준씨의『화령장기행』(현대문학) 이 던지는 문제점을 고찰해둘 필요를 느낀다. 이 작품은 다음 두 가지 문제 제기를 내포한다.
그 하나는「르포·장르」와 소설이라는「장르」의 균형이 가능한가에 대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역사」와 체험 사이에 놓여 있는 골짜기에 대한 것이다. 작가인「나」는 소설 쓰기 위해 6·25의 한 격전장을 답사한다. 강씨는(의도적으로) 첫 문절에서「주어」를 완전히 제거해 놓았고 끝 부분 자기 체 점으로 향할수록 주어가 빈번히 사용된다.
이「르포」에서 작품으로 이어지는 접점에「역사」대「체험」의 비 융합 성이 자갈처럼 깔려있다.『하모, 대포알이 막 날아오고 굉장 했능기라…거기서도 억 시게들 죽었능기라』 라는 측면이 소위 체험의 양상이다.
반면 역사 그것의 측면은 기록에 의한, 이미 고정된 단선적 양상이며, 따라서 추상이며 과학이다.「아라비아」숫자와 기호로 유폐된 저 역사라는 감옥과, 체험이라는 이 애매성사이의 싸움이 문학이라면 그것은 이 쌍방을 위해서도 전력을 기울여 해볼만한 일이다.
「카뮈」의 유명한『이방인』이란 작품의 최대의 소설적 쟁점이 작품 전반부와 후반부의 문제의 차이에 있었다. 주제는 쉬 낡아버리는 법이다. 역사와 체험 그것은「플로베르」가 끝내 앓았던 병이었다.
넷째로『두 조우』(정학송「현대문학」)『별을 낚다』(김용운「문학사상」『어둠의 혼』 (김원일「월간문학」)세 작품에 대한 문제점이다. 그것은 자전적 범주에 들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전기 두 작품이 그러하다.
6·25때, 혹은 군에 있을 때의 심리적 파상(트라우마)과 현재의 나의「겨룸」이 낚시로 나타나고 있는바, 문제는 그 자숙전적 체험과 현재의 나의 위치가 거의 소설적 처리를 하고 있지 못하다는데 있는 것이다.
이 진술은 이러한 유형의 작품이 빈번히 씌어진다는 것이 정직함이라고 인정되기 위해서는 공적인 단위설정을 조작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특히「어둠의 혼」은 높은 수준의 문체와 묘사의 적확 성에도 불구하고 구성력의 빈곤으로 한자리 이야기가 되고 만 듯이 느껴진다. 한국인만이 알 수 있는 이 역사의 체험을 위해 김원일씨는 이미 없는「이모부」다음자리에 절대적 조사「는」대신「가」를 사용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끝으로 이문희씨의『다리』(문학사상) 송상옥씨의『겨울비』(동)등이 던지는 소설적 흥미에 관한 문제점을 지적해두고 싶다. 이씨의 괴짜에 대한 소설적 파악 력, 김씨의 일상성에의 「니힐」따위는 사춘기를 넘어선 여론의 세계일 것이다.
서투른 역사의식에의 도전일지라도 도전 그 자체가 중요하냐 아니냐의 여부에 대해서 나는 아직도 분명히 알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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