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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무작정상경소녀」길잡이에 큰 보람"|부녀보호 사업가 김영희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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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05면

김영희씨의 하루 일과는 날이 채 밝지 않은 새벽 4시30분이면 시작된다. 서울역에 도착하는 첫 기차의 도착시간에 맞춰 역에 나가서는 아무런 계획 없이 서울에 발을 딛는 여성들을 찾아 보호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기차가 올 때마다 역에 내리는 15세∼22세 정도의 소녀들을 붙들고 그들이 부모 몰래 집을 뒤쳐 나오지는 않았는가, 그렇다면 어떤 이유에서이며 서울에서 갈 곳은 있는가 등을 알아보고 부모가 있는 가정에는 편지를 띄우거나 다음 기차로 몰려보내고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상의 소에서 하루 혹은 며칠 간 묵도록 보호한다. 미처 숨돌린 사이도 없이 오전은 거의 30분 간격으로 지방곳곳에서 도착하는 소녀들을 돌보게 되는 것이다.
해마다 4,5월 봄철이 되면 시골에서 상경하는 소녀들의 수는 하루에 1백70명∼2백여 명이나 된다. 그래서 청소년 선도의 달로 지정된 5월에는 아무런 준비 없이 서울에 도착한 소녀들의 보호활동이 비교적 활발한 편이다.
『그러나 봄철 아닌 보통 때도 하루 평균1백50여명의 소녀들이 서울에 오는데 이들을 위한 보호활동은 드물어요. 이처럼 많은 소녀들이 길조차 모르는 서울에 와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정하지도 않은 채 역에 내리기 때문에 서울역 주변은 이런 소녀들에게 가장 위험한 굿이 되고있어요.
영등포구 대방동에 있는 시립 부녀 보호 소에 보호되어있는 여생들의 경우를 보더라도 잘못된길로 빠진 여성들은 거의 모두가 서울역에서 낮선 사람의 꾐에 빠진 탓이죠.』
김영희씨가 서울역을 중심으로 한 여성보호사업을 시작한 것은 63년 4월. 그는 기독교부녀 구원상의 소를 차리고 소장 직을 맡았었다. 그 후 7O년에는 1천9백27명에 이르는 소녀들을 보호했을 만큼 그는 계속 바쁘게 일했다.
윤락여성방지사업을 위해 구체적으로 이 상의 소를 세우게 된 것은 그 당시 미국 선교사 부인으로 한국에 와있던 「프란시스·킨슬러」여사의 도움이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한국에 와있는 미국의 선교사부인들은 매달 무임을 갖고 어떤 뜻 있는 사업을 펴나가기로 결정했었는데 김영희씨의 사업계획에 적극 찬성, 우선 건물을 빌려주겠다는 제의를 해왔다. 그래서 서울역 앞의 옛「세브란스」병원 안에 있는 30평 짜리「퀀시트」건물에서 우선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올해 54세인 김영희씨는 경주에서 태어나 봉천 여자고등학교를 마친 후 북경시립여자사범대학을 졸업했다. 22세 때 김상봉씨와 결혼했으나 5년만에 사별, 해방 전에는 배경에 있는 숭문여중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이런 사업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6·25동란 때였어요. 1·4 후퇴 당시 나는 향토방위 대 부녀 부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자연히 피난이 늦게 되었죠. 그런데 어느 날 일을 끝내고 집에 와 보니 두 남매는 이미 동네사람들의 권에 따라 피난을 떠나버리지 않았겠어요.
그래서 그때9살,8살이던 두 아이들을 잃게되었는데 나중에 대구에서 기적같이 만나게 될 때까지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이때 전쟁이 끝나면 남을 도우며 살 것을 굳게 결심했지요.』 전쟁이 끝나 서울로 돌아온 후 김 여사는 비참한 전쟁미망인들을 위해 창신 모 자원을 세웠었다. 무 자원 사업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56년에는 서울시 부녀 과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부녀보호사업 서울시연합회상무이사였던 김 여사는 시립부녀 보호 소에서 일하면서 『윤락여성들의 딱한 사정을 결실히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63년 서울시를 사직하고 시작한 이 사업은 1년 후에는 선교사부인들의 도움이 끊겨 어려움에 부딪쳤다. 우선 일손이 모자랐고 경비를 충당할 수가 없었다.
교인인 김 여사는 그때 중구에 있는 교회들을 찾아가 협력해 줄 것을 호소, 교회부인회의 도움을 받았다. 또 상의 소 후원회(회장 정선명 여사)가 조직되어 경제적인 지원을 받기도 했다.
만 9년째에 이르는 상의 소 운영 중 지난 7O년「퀀시트」건물이 헐리게 되었을 때가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고 회상하는 김 여사는 앞으로의 많은 계획들을 준비하고있다.
『현재는 상의 소(중구도동에 위치)가 넓지 않아 하루 10∼15명 정도의 소녀들만이 숙박하고 있어요. 앞으로 3층 정도의 건물을 지어 서울역에 내린 소녀들 중 갈곳 없는 소녀는 물론 직업을 가진 여성들의 무료숙소가 되도록 할 계획입니다.』 63년 처음 사업보다 시작할 때도 그랬지만 이제 두 남매 호경씨(34세·국립공보관근무),정웅씨(33세·미8부 근무)는 모두 성인이 되어 결혼, 어머니의 사업을 돕고있다.
자신의 가정에 따로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김 여사는 상의 소 운영에 모든 시간을 바치면서 『자칫 잘못 될 뻔한 소녀들이 이세상의 여러 가지 면을 깨닫고 마음을 돌려 고향으로 돌아 갈 때에는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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